18대 대선 패장(敗將)들의 정계복귀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과거 대선에서 패배했던 후보들은 낙선의 고배를 달래기 위해 한동안 정치권을 떠나 자기만의 시간을 보냈다.
최소 6개월 이상 해외로 나가 소위 잠수를 타는 것이 관례로 여겨졌을 정도다. 이들은 잠시 정치권과 거리를 두며 대선패배에 대한 분석과 새로운 정치적 밑그림을 그린 뒤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대선 패장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장시간 공을 들여 새로운 정치적 메시지를 다듬기보다는 빠른 분석과 판단, 결정으로 정계복귀 시계를 앞당기고 있다.
4·24 재보궐선거를 통해 안철수와 문재인이라는 야권의 중심축이 다시 정치권에서 위력을 드러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안철수 후보는 지난 3월11일 재보선 서울 노원병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지난 대선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의원에게 후보직을 양보하고 대선일(지난해 12월1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지 82일만이다.
노원병 출마를 선언한 후 그의 행보는 연일 화제가 됐다. 그는 노원에서 3월12일 전입신고, 다음날인 13일에는 예비후보 등록을 마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노원병 사수의 의지를 보였다.
특히 그의 복귀가 주목받은 이유는 '안철수발(發) 정계개편' 등 정치권의 지각변동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안 후보는 국회의원 배지를 획득한 뒤 '정치세력화-신당창당-정계개편'이라는 시나리오를 통해 야권의 중심으로 자리잡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 후보가 새누리당 허준영 후보를 앞서고 있지만 승리를 장담하기는 시기상조다. 투표율이 높지 않은 재보선의 특성과 야권 후보의 난립으로 표가 분산될 가능성이 높아 안 후보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무소속인 그는 부족한 조직력을 극복하기 위해 지역주민들과의 잦은 스킨십을 통해 민심다지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재인 의원은 대선 패배후 안 후보보다 더 빠르게 정계복귀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문 의원은 대선 패배후 잠시 가족과 시간을 보낸 후 트위터 정치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근황은 물론 사회 문제에 대한 의견도 피력하는 등 지속적으로 온라인상에서 시민들과의 만남을 이어갔다. 또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는 등 정계복귀를 위한 예열을 마쳤다.
지역구 활동에 집중하던 문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지난 2월26일 국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달 27일에는 상임위인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에 출석했고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인사청문회가 열린 3월13일에도 기재위에 참석하기도 했다.
당을 구할 구원투수로 끊임없이 지목되기도 했다. 당 혁신과 쇄신을 위해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문 의원의 역할론을 계속해서 부각시켰지만 비주류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문 의원은 또 이번 재보선을 위해 전면지원에 나서는 등 본격적인 정치권 복귀를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김영록 재보궐선거대책상황실장은 5일 오후 문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선거지원을 요청했다. 문 의원은 "(부산 영도에 출마한)김비오 후보를 적극 돕겠다"며 지원의사를 밝혔다.
통화에서 문 의원은 김 후보를 돕겠다는 뜻을 밝히며 "중앙당도 김 후보를 많이 도와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친노 핵심 관계자는 지난 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문 의원은 4·24 재보선에서 전국적 지원에 나설 뜻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지역구가 있는 부산을 벗어나 충남 부여·청양 국회의원 재선거는 물론 기초단체장 재보선 등 전국을 순회하는 유세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안철수 후보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지원유세에 나서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문 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까지 지냈던 만큼 한 지역구에서만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활동반경을 전국 수준으로 확대해 정치적 무게감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문 의원이 선거지원을 수락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정계복귀가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주류의 거센 견제와 반발을 넘어서는 것이 전제다.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의원과 다르게 정치권 일선에 복귀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인물도 있다. 바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보수층의 표결집으로 진보진영의 패배에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 등 나름 혹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2월 다시 진보당 대표로 복귀하면서 화려한(?) 정치적 재기를 선언했다.
"민중 속에 뿌리내려 단합의 기초를 단단히 쌓는 데 힘을 모으고 삶의 터전에서 진보당의 이름으로 만나겠다"고 당선소감을 밝힌 이 대표는 당의 재건과 진보당만의 색깔을 부각시키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해외서 심기일전하고 있는 대선 패장들도 있다. 민주당 손학규 상임고문과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다.
지난 1월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떠난 손 고문은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근황과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간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손 고문은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저녁이 있는 삶'을 구체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후 독일에서는 측근들과 대선 경선 캠프 출신 인사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근황을 전달했다.
그는 약 6개월 동안 베를린에 머물며 독일 사민당의 싱크탱크인 프리드리히 에버튼 재단의 후원으로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할 예정이다.
김 전 지사는 지난달 11일 지지자들의 환송을 받으며 손 고문이 있는 학교로 떠났다. 앞서 그는 측근들에게 '타지에서 혼자 지내면서 다시 아래에서부터 고생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아래에서부터'는 지난해 대선 전 출간한 자신의 수필집 제목이자 동시에 당 대선후보경선 당시 선거표어이기도 했다.
김 전 지사는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 약 6개월간 머물며 독일 연방제를 비롯해 독일의 통일 이후 사회통합 과정, 유럽형 자본주의 모델 등을 연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9월로 예정된 독일 총선까지 현지에서 경험한 뒤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다. 정계 복귀를 위한 심기일전(心機一轉)의 상태인 것이다.
전문가들은 대선 패장들의 조귀 복귀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성향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신율 교수는 "대선 패장들이 정계복귀에 대한 법칙은 없다"면서도 "정치적인 흐름에 따른 것이기 보다는 개인의 성향과 당권확보 차원으로 빠르게 복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빠른 정계복귀로 인한 비난을 받을 수 있어 대선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현재 형성된 정치 상황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맞물려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자들의 빠른 정계복귀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