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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영화론]손예진은 가라, 첫사랑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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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영화론]손예진은 가라, 첫사랑이 변했다
  •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12.05.10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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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의 ‘영화를 논하다’

한국영화에서 ‘첫사랑’이 한층 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첫사랑의 소녀 내지 여인은 이슬만 먹고 화장실도 안 갈 것처럼 마냥 이상화한 여성상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이 자리 잡은 동안 서로가 근접하지 못하면서 생긴 오해라면 오해였다.

이른바 ‘첫사랑 아이콘’으로 불리던 청순 여배우 손예진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남성들에게는 손에 닿을 것 같지 않고, 때묻지 않은 천사같고 선녀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다. ‘취화선’(2002), ‘클래식’(2003), ‘첫사랑사수 궐기대회’(2003) 등을 거치며 병약하고 가련하며 보호본능을 한껏 자극하는 인상이 강화돼왔다. 고전주의 시대에 괴테가 그린 첫사랑 로테의 모습에서 한 치도 성장하지 못했다고 할까.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됐던 이런 자태가 시대가 변하면서 땅 위로 내려와 굳건히 현실에 발을 디디게 됐다. 최근 빅히트를 치고 있는 영화 ‘건축학 개론’은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타이틀을 내걸 만큼 사실적인 첫사랑 상대를 보여주고 있다.

30대 이혼녀가 돼 나타난 서연(한가인)은 술에 취하자 마구 험한 욕설을 뱉을 만큼 현실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이지만, 대학 1학년 때의 서연(수지)도 거리낌 없이 그 또래 여대생이 쓸 만한 말투를 툭툭 내뱉는다. 먼저 접근해 반말을 쓰자고 제안할 정도로 주체적이면서도 스스럼없다. “내가 서울 올라오려고 얼마나 난리쳤는줄 아느냐”처럼 딱 그 나잇대에 할 말한 표현과 어조를 생생히 잘 살려냈다. 게다가 강남에 살고 싶어하고, 강남에 사는 선배를 짝사랑하는 그 또래가 가질만한 속물근성도 현실적이고, 기대 자다 깨서 오줌이 마렵다며 망 잘보라고 당부하며 쑥스러운 순간을 자연스럽게 넘기는 것도 딱 있을법한 상황이다.

영화 ‘은교’도 이상적인 첫사랑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부박한 소녀를 그려냈다.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는 자신을 따르는 여고생 한은교(김고은)에게서 순결한 첫사랑의 이미지를 애타게 갈구하지만, 은교의 그런 이미지는 이적요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실상은 ‘발랑 까진’ 여고생이 있을 뿐이다. 이적요가 훔쳐보는 섹스신에서 은교는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김무열)와 능숙하게 성교하는데, 이는 이적요가 ‘처녀’로 이상화한 것과 달리 이미 다수의 성경험이 있었다는 의미다.

은교는 결코 속이 깊거나 유별나게 감수성이 뛰어나거나 특별히 외모가 아름다운 소녀도 아니다. 그저 세탁소를 찾아 교복치마를 짧게 줄여 입고, 또래 아이들이 쓰는 비속어를 툭툭 던지는 10대 여자애일 뿐이다. 박범신의 원작소설을 보면 변호사 Q의 시선으로 이런한 점이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되는데, 노시인은 그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젊음이라는 싱그러움에 매혹됐을 뿐이다.

영화에서 은교의 말투도 아주 리얼하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위치한 여학생이 쓸만한 좀 어리광부리는 듯하면서도 아이와 같은 울림이 있는 발성이다. 김고은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은교라는 아이를 관객들에게 선명하게,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아이라는 것을 보여 드릴 수 있겠다”며 “영화 속에서 한없이 순수하고 발랄해서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까불기도하고 버릇이 없을 때도 있잖아요”라고 영리하게 짚어낸 모습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은교가 두 남자어른 사이에서 결코 수동적으로 머무르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시인의 집으로 먼저 찾아오고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한 것도 은교였고, 서지우의 잠자리로 다시 찾아든 것도 은교였다. 영화에서는 남성의 시선에 갇힌 피사체로 지정될 수밖에 없는 영상매체 표현의 한계에 매어 있지만, 역동적이고 도발적으로 관계를 먼저 맺어나가며 능동성의 여지를 보여줬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

오히려 이러한 남성 역할의 배우가 가진 고유의 순수한 이미지가 ‘첫사랑’이라는 영화의 테마에 더욱 빠져들게 하는 요소가 됐다. 그들이 꿈꾸기에, 그들 마음속 첫사랑에 관객의 공감도가 한껏 상승할 수밖에 없는 구도다. ‘건축학개론’에서 이제훈은 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와 성욕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순진무구한 눈빛과 표정, 투박한 언행으로 첫사랑의 순수성을 지켜냈다. 마냥 서툴면서도 끝없이 벅차오르는 감정, 혼자 상상하고 착각하고 배신감에 떠는 오해도 이제훈이 연기했기에 수긍할 수 있었다.

‘은교’도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지닌 해맑은 외모와 풋풋한 이미지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다. 정지우 감독도 이를 알고 일부러 젊은 박해일을 캐스팅해 노역 분장을 시켰을 것이다. 극중 이적요와 은교가 성적 접촉을 하는 것도 박해일이 본래의 젊은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뿐이다. 진짜 늙은 남자배우에게 이적요 역할을 맡겼더라면 이 영화는 추잡한 ‘페도필리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정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한 박해일이 가진 ‘호감’이라는 것도 이러한 광범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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