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증을 교부받지도 않았지만 모든 이들은 그를 '시장'이라 불렀다.
그의 이름 앞에 어울렸던 변호사, 상임이사 등의 직함의 무게는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직함 앞에서 의미를 잃었다.
손 아랫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원순씨'라 불리길 원했던 그는 27일 새벽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자로 확정되면서 서울시 직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누구는 대통령 안 부러운 자리라지만 서울시장의 첫 귀갓길은 고단했단다.
박 시장이 사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A아파트 경비원에 따르면 박 시장은 이날 오전 1시40분께 자택 앞에 도착했다가 자신과 대화를 나눈 뒤 2시께에야 집으로 들어갔다.
이틀 전 새벽부터 한토막의 잠도 없이 진행된 유세 탓인지 적잖이 피곤해보였다고 경비원은 전했다.
날이 밝아 첫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지만 시청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당초 6시께 렌터카편으로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출발하려 했지만 차량도착이 늦는 바람에 뒷문으로 나와 수행원 몇과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노량진수산물시장을 찾아야했다.
덕분에 새벽부터 자택 앞에서 박 시장을 기다리고 있던 시청직원들과 기자들은 헛물을 켜야했다. 일단의 취재진을 본의 아니게 따돌린 셈이지만 이미 노량진수산물시장에는 50여명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박 시장을 보자 덤벼들었다.
노량진수산물시장 상인들은 시장 1일차에게 에누리가 없었다.
자신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한 수산물가게 아주머니는 "이왕 온 김에"라며 꽃게 1Kg 2만원어치를 '강매'했다. 권오중 상황부실장은 꽃게가 담긴 검정색 비닐봉지를 덜렁거리며 박 시장을 수행해야 했다.
시민들과 얘기를 나누려고 해도 자리싸움을 해대는 취재진 탓에 환영보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어수선한 시장을 빠져나온 박 시장은 서울시장 당선인이 치르는 의례 수순대로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말쑥한 양복으로 차려입고 참배를 마친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순백의 방명록에 한자 한자 자신의 흔적을 검정펜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함께 가는 길 2010. 11. 27 박원순'
일순 측근들의 얼굴이 경직됐다. 누군가 속삭였다.
"시장님 2011년인데요."
"어, 그래요?"
박 시장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덧칠을 해 '2010'을 '2011'로 수정했다. 국립현충원 특유의 엄숙한 분위기 탓에 누구도 대놓고 웃지 않았지만 주위에서는 실웃음이 새어나왔다.
박 시장의 고난은 동작역에서 출근길 전철을 타면서 본격화됐다. 이 시간대 구름떼처럼 몰려든 취재진과 박 시장 일행이 들어갈 객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눈치 없는 전동차 운전사가 자신의 탑승을 기다리느라 출발을 잠시 늦추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박 시장은 당황한듯 "일단 가세요. 잡은 겁니까?"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이 볼펜 한자루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찬 전동차가 3차례나 지나갔다.
박 시장은 승객들의 안전한 탑승을 돕는 공익요원 두명과 복무기간 등을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박 시장은 "무슨 일이든 배울 수 있는 게 다 있다"며 "힘들면 힘들대로"라고 격려했다.
박 시장이 간신히 전철을 타자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공익요원은 "때를 잘못 고르셨다"며 "타실 공간이 남으려면 9시10분은 되어야 한다"고 웃었다.
서울역 환승역에서도 박 시장의 고난을 계속됐다. 박 후보는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올리는 시민들을 향해 무심결에 악수를 청했다가 3~4명과 잠시 정담을 나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대화를 나눈 곳이 계단이었다. 박 후보가 멈추자 수행원들이 멈췄고, 기자들이 몰려들면서 계단은 정체를 이뤘다.
바쁜 출근길을 재촉하던 시민들이 갑작스런 정체에 볼멘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지사. "시장이 뭐 하러 지하철을 타서 이 바쁜 시간에 난리냐"고 김정식(38)씨는 투덜댔다. 평소 지하철을 즐겨 타며 시장이 되어서도 지하철을 애용할 것이라고 확언했던 박 시장이 머쓱해질만한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그래도 서울시장과 얼굴을 맞대고 직장으로 출근하는 것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40대로 보이는 A(여)씨는 "바빠서 투표는 못했지만 원순씨를 잘 알고 좋아해왔다"며 "시장과 함께 전철을 타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는 박 시장 때문에 출근길이 혼잡해지지 않았느냐는 지적에 "기자들이 언제까지니 계속 붙겠느냐"며 "원순씨 말대로 시장이 졸면서 전철을 타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황모(39)씨도 "현실적으로 힘들지 모르겠지만 기자들 숫자 줄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준다면 지금처럼 피곤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안모(75) 할아버지는 "아침에 보니까 텔레비전에서 볼 때보다 젊어 보여 좋긴한데, 사람들 몰려서 시달리면 집무일 할 때 피곤하니까, 안 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만원전철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박 시장은 시청을 목전에 두고 활동보조금 자부담 폐지를 요구하는 장애인 농성자, 분식집 아주머니 등과 얘기를 나누느라 또다시 발걸음을 멈춰야했다.
박 시장이 시청사앞에 도열한 200여명의 시청직원들과 조우한 시각은 9시10분께. 평소 시간 잘 지키기로 소문만 박 시장이 출근 첫날부터 지각까지 한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