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남해의 연한 물살,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를 생각하자. 드디어 그 긴 겨울도 지나고 있다.)'
마중기 시인의 시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는 연극 '아버지'의 정서를 대표한다. 대본과 연출·연기를 동시에 맡은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은 14일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 '아버지' 기자간담회에서 "우리 아버지들의 운명은 국물을 내면 버림받는 멸치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그런데 그럴 수만은 없지 않으냐. 그 멸치가 남해에서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싱싱하게 헤엄치던 그 시절처럼, 그 아버지들의 노고와 힘, 위상을 찾아줘야 한다"며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고 가족 간의 사랑을 회복하는 조그마한 자극제가 됐으면 한다"고 바랐다.
연극 '아버지'는 작가 아서 밀러의 고전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청년실업과 노년실업, 88만원 세대의 비애와 가족의 해체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며 우리 시대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원로배우 전무송(74), 권성덕(74)과 김명곤(63) 전 문화부 장관이 '정재민'을 연기한다. 고교시절 축구 유망주였지만 서른이 넘어서도 일용직 신세를 면치 못하는 아들 '동욱', 계약직 점원 신세인 딸 '동숙'을 둔 아버지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뛰다가 나중에는 가족과 사회 둘 모두에게 버림받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권성덕은 "아버지 역할을 꼭 하고 싶었다"며 "좀 더 일찍 기회가 올 줄 알았는데 이제야 영광을 얻었다"고 기뻐했다. 이어 "아버지 역을 하기에는 조금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무대에서 할아버지로 보이지 않기 위해 검은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했다"며 웃었다.
우리나라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가장 많이 연기한 배우이자 '아버지'의 정재민을 2012년부터 연기하고 있는 전무송은 "처음 아버지 역을 시작할 때는 우리 아버님을 흉내 냈다면 이제는 아버지가 된 나를 연기한다"는 소회를 밝혔다.
'아버지'는 2012년 초연 이후 지난 3년 동안 제주도를 포함해 전국 33개 지역 투어 공연을 했다. 2003~2015년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우수 공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공연은 기존의 중·대극장 무대가 아닌 200여 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열린다.
김 전 장관은 "원작의 아버지를 오늘날의 아버지로 대치해도 전혀 무리가 없고 현실감 있는 이야기"라며 "더욱 현실감 있는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공연을 하면서도 계속 내용을 손질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소극장 공연에 맞춘 새로운 무대 디자인과 더욱 가까워진 배경을 선보일 예정이다. 문영수, 김종구, 고동업, 조원희, 차유경, 권지숙, 판유걸, 박재민 등이 출연한다.
5월1일~7월26일. 동양예술극장 2관. 3만5000~5만원. 선아트컴퍼니. 02-515-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