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가 생산된다는 ‘시뮬라시옹’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는 하이퍼리얼리티의 대표적인 사례로 디즈니랜드를 들었다.
입체·비디오 설치·인터렉티브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로 작품 세계를 펼쳐온 미술가 정소연(47)이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이른바 ‘디즈니랜드 효과’를 화폭에 풀어놨다.
19일부터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이화익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네버랜드 시리즈’다. 20년 만인 2009년부터 다시 붓질을 시작했다는 정소연이 이번에 소개하는 신작은 여러 도감에서 빌려온 이미지들로 연출했다. 화면 속 이미지는 식물이나 동물도감 등 여러 도감류 서적에서 가져온 것들로 ‘실현 불가능한 기호의 숲’이다.
정소연은 “실제 꽃을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도감에 있는 이미지, 하나의 기호”라며 “실현 불가능한 기호의 숲이라고 한 것은, 화면의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아서”라고 설명했다. “도감에 나온 꽃은 가장 예쁜 순간, 과일도 가장 탐스러울 때의 것들이다. 사자의 모습도 가장 용맹스러운 순간을 담는다. 우리는 그런 완벽한 이미지와 기호에 익숙해져 있다”며 “그래서 내 작업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각기 다른 기후와 토양에서 서식해서 공존할 수 없는 다양한 꽃과 식물이 한 화면에 뒤섞여있다. 중력의 법칙도 무시하며 화면에 자유롭게 배치했다. “이미지들은 전 세계 도감에서 하나하나 따오기 때문에 화면 속 숲이나 정원은 현실 같은 꿈이다.”
작업은 도감을 스캔한 다음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빼내 재조합하고 편집해 캔버스에 올린다. 유화와 아크릴을 병행했던 전작 ‘홀마크 프로젝트’ 시리즈와는 달리 이번 작업에서는 유화만 썼다. 붓은 부채꼴 모양의 팬 브러시를 썼다. 여기에 공기 방울이나 구멍이 생기는 현상을 줄여주는 글로스 바니시를 얹었다. 광택이 나는 매끈한 표면에 실재 같은 그림으로 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정소연은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졸업한 뒤 미디어아트를 했다. 오랜만에 붓을 들었으나 ‘이대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학생’이었던 그녀에겐 어렵지 않았다. “다시 붓을 들면서 기존의 회화와는 다른 회화를 하고 싶어 많은 고민을 했다”는 정소연은 “그동안 회화 작품을 보면서 새롭다, 좋다고 느낀 게 많지 않았다. 이미 누군가 다 했던 것들”이라며 “나만의 새로운 회화를 찾다가 지금의 그림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갤러리 측은 “도감에서 가져온 이미지로 이뤄진 정소연의 네버랜드는 꿈과 현실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이자 그 사이에 존재하는 블랙홀”이라며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또 다른 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다. 02-730-7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