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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 보유자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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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 보유자 김경수
  • 송준성 기자
  • 승인 2022.11.14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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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수 단장.
▲ 김경수 단장.

제30회 임방울 국악제 전국대회
‘동두천 이담농악’ 농악부문 ‘대상(국회의장상)’수상

광주광역시가 주최하며 (사)임방울국악진흥회가 주관하는 제30회 임방울 국악제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2022년 10월14일부터 4일간 개최한 대회는 학생부, 일반부, 명창부 3개 부문을 10월14일(금) 18:20 전야제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학생부에는 판소리(초, 중, 고등부), 기악(중, 고등부(관악, 현악), 무용(중, 고등부) 일반부에서는 농악, 기악, 판소리, 무용, 가야금병창, 시조, 퓨전국악, 명창부에서는 판소리 종목을 경연한다.

제30회가 되는 임방울 국악제 전국대회는 국창 임방울 선생의 본고장으로서 모든 시민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국악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국악의 향수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역사가 있는 대회인 만큼 타 국악경연대회보다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역사성이 짓은 대회에서 동두천을 대표하는 동두천 이담농악보존회가 제30회 임방울 국악제 전국대회에서 보유자 김경수가 이끄는 이담농악이 농악 일반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담농악 보유자 ‘김경수’

이담농악은 경기도 동두천 시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경기 북부지방의 양주시 문화권에 본류를 둔 농악으로, 이담농악보존회가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향토 지적재산, 2017년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이담’은 1963년까지 양주에 속해있던 동두천의 옛 고을 이름이다. 양주지역은 예부터 수많은 뜬쇠들이 배출된 농악의 고장이었으며 마을마다 농악대가 구성되어 있었다. 

1945년 광복 전후로 양주지역에서 개최된 각종 농악 경진대회에서 많은 상을 차지하였다가, 겨우 명맥만 유지되던 중 1995년 ‘이담농악 보존회’가 구성되었다. 1997년 ‘우리소리 한마당’에서 재현되었고, 1999년 ‘경기도 민속경연대회’ 대상 수상을 시작으로 2007년 ‘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 창단, 2017년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지정, 2022년 ‘임방울 국악제’ 대상 수상 등 부흥하게 되었다.

이담농악의 ‘김경수’ 보유자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예술융합학과 박사과정 6학차 재학중이며, <동두천 이담농악의 전승과 활성화방안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동두천 시립이담농악단의 단장으로서, 단원 모두의 석박사 학위 취득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는 자신이 몸소 나서서 학위 취득을 준비하고 있다. 

실기와 예술은 비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공연예술 문화를 직접 공부하고 그것을 활성화할 방법을 찾아나서고 있다.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 보유자 김경수

김경수 보유자는 충청남도 금산군 태생으로, 어릴 적부터 밴드부 활동을 하는 등 예술적 기질이 엿보였다. 어느 날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보기만 했던 장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농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금산농업고등학교 농악부에서 좌도농악 김봉열 선생님께 사사하고, 졸업과 함께 한국민속촌에 입단하여 정인상 선생님께 전라우도 농악을 사사했다. 전주대사습놀이 대통령상, 금산인삼제 농악경연대회 개인 최우수상 수상 등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은 족적을 남기던 그는 송순갑 선생님께 웃다리농악을 사사받으며 전국 각지의 다양한 농악을 배우게 된다.

전역 이후, 예맥 남사당 사물놀이와 워커힐 예능부, 김덕수 사물놀이패 활동을 거치며 사물놀이 ‘진쇠’와 (사) 한울림예술단을 창단하기도 하며 한국만이 아닌 전세계에서 활발한 공연을 펼쳤다.

동두천 여상 풍물반, 국립전통예술 중-고등학교 출강, 선화예술중학교 출강 등의 경력이 있으며, 예원예술대학교 공연예술학부 무용과를 졸업하였다. 

현재는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외래교수, 성신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겸임교수 등 교육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동두천 혁신교육지구 이담초등학교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 예능보유자이자 동두천시립 이담농악단 꼭두쇠(단장)로서 동두천과 동두천시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다. <국악실기 사물놀이 지도자 교본>을 출판하며 사물놀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쉽게 기술해 사물놀이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는 평을 듣고 있기도 하다.

이 밖에도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사)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 지부장, (사)대한명인회 선정 사물놀이 채상설장구 명인, (사)한국국악협회 이사, (사)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 (사)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동두천지회 부지회장 등 수많은 직함을 달고 있으며 현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예술융합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등 배움을 위해 학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동두천 이담농악과의 인연

김덕수 사물놀이에 있는 동안 송귀철 선생님을 통해 동두천 여상 김흥래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당시 ‘사물놀이 진쇠’ 팀원들과 함께 동두천 여상의 풍물반을 지도하게 되며 동두천이라는 도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 1994~1995년 당시, 동두천 여상 풍물반을 통해 동두천 지역의 농악을 조사하게 되었다. 

동두천에선 어유소 장군이 1000년을 살았다는 은행나무 아래 단을 쌓고 학문과 무예를 연마한 데서 유래된 ‘행단제’라는 축제가 전해져 내려왔으며, 송내농악과 안흥농악 등 주변 농악들이 다수 존재했다. 

출신지역 사람이 아닌 타지인이 동두천 농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처음엔 백안시하던 사람들도 끊임없는 연구 속에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현재의 이담농악이다. 

동두천의 옛 지명인 <이담>을 따서 만들어진 이담농악은 동두천지역에서 행해지던 가락, 즉 행단농악, 송내농악, 안흥농악 등이 정착된 웃다리 가락을 기본 바탕으로 재창조된 농악으로, 행단제와 같은 제사의식과 마을간 줄다리기, 씨름대회 등에서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고 단합을 이끄는 소재로 이어온 동두천지역 고유의 풍물놀이이다.


동두천 시립 이담농악단과 이담농악 보존회

이담농악을 연구하며 이담농악 보존회를 창단하였다. 당시 동두천은 문화 불모지역에 가까웠는데, 시민들은 문화공연에 대한 관심도가 적었고 관내 행사의 공연료조차 마땅치 않았다. 

보존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동두천시와 함께 노력하여 동두천시립 이담농악단을 창설하게 되었지만, 당시 시립이담농악단의 첫 월급은 13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나 미래를 위해, 시간과 열정을 들여 견뎌왔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공연에 대한 관심도가 적다면 앞으로 바꿔보겠다라는 마인드와 공연비가 없더라도 무대에 선다는 열정과 간절함만으로 공연에 임했다. 조금씩 동두천에서 입소문을 타게 되고, 후원이사회가 결성되었으며, 경기 북부에서부터 서울, 대한민국 전체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동두천과 동두천 이담농악을 알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의 과제로는 이담농악단의 단장으로서 어떻게 해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고,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가가 남아있다. 이담농악 보존회의 농악단은 농악단으로서의 전통을 지키며 이담농악을 전승과 보존하는 데 집중하고, 동두천시립 이담농악단에서는 발전과 변화, 창작을 통해 동두천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농악단 전원의 석-박사”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고,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동두천 국악협회

동두천은 대한민국 최북단에 있는 도시로, (사)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의 김경수 지부장이 처음 방문했을 땐 문화적으로 미개척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도시였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척박한 곳에서도 경기민요, 서도소리, 가야금 병창을 전승해오던 문화인들이 존재했다. 이들과 함께 동두천 국악협회를 경기 북부, 나아가 한국 최고의 지부로 만들기 위한 변화의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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