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인 10일 오후 5시께 서울 중구 덕수궁앞 지하도.
폭 10여m, 길이 30m 남짓한 이 지하도는 서울시청 신청사와 시의회를 연결하는 통로구실을 하고 있다.
덕수궁 대한문과 한국프레스센터, 코리아나호텔, 그리고 문재인과 안철수의 후보단일화 담판이 벌어진 한식당 달개비도 이 지하도를 통해 오갈 수 있다.
한복 차림의 젊은 부부가 계집아이를 사이에 두고 지하도 초입에 들어섰다. 색동옷을 입은 아이의 눈길이 득의양양했다. 낮 동안 거둬들인 세뱃돈의 부피가 가늠됐다.
지하도 구석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길이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시선이 닿은 곳마다 노숙인들이 종이박스로 펜스를 쳐놓고 그 안에서 머리끝까지 침낭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종이박스 펜스는 얼핏 작은 요새처럼 보일 듯했다.
지하도를 거처삼아 지내고 있는 노숙인은 4명.
올해로 팔순을 맞은 김윤식(가명) 할아버지도 그 중 한명이었다. 다른 3명이 나름, 물 샐 틈 없는 요새를 구축했다면 할아버지의 요새는 콧방귀에도 날아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해진 캐시미어 이불을 끌어안은 채 할아버지는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노숙인 특유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겸, 따뜻한 홍삼드링크 2병을 건넸다.
함부로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이 뒤엉켜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건강상태를 묻자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하루에 3~4개피 밖에 안 피니 아픈 데는 하나도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장갑 낀 손은 홍삼드링크 뚜껑조차 비틀어 딸 수 없었다.
조심, "따 드릴까요?"라고 묻자 할아버지의 웃는 입 속에 송곳니 하나가 종유석처럼 매달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 지하도에서 4년째 살고 있단다. 아침은 언제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단다. 점심식사는 영등포 역전에 있는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고, 저녁식사는 지하도 입구에서 자선단체 회원들이 나눠주는 무료 도시락으로 때우는 게 일상이라는 게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설 이틀 전 영하 18도의 강추위를 50kg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가냘픈 몸이 어떻게 견뎠는지 궁금했다.
찬바람이 불 때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종이박스를 세우고, 그 아래에 몸을 웅크리면 추위는 문제될 게 없다고,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고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필요한 건 없다"며 "그저 신발, 푹신한 깔창 깐 신발 하나만 있었으면…"이라고 수줍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내민 캔버스화 한 짝. 깔창이 밑창에 눌어붙은 그것은 낡은 슬리퍼와 다름 없었다. 신발을 만져보려 하자 "더럽다"며 감추는 손길에서 부끄러움이 배어났다.
겨울철이면 체력소진을 막기 위해 끼니때를 제외하고 낮 동안 웅크린 채 잠을 청하는 대부분의 노숙인과는 달리 자신은 하루 종일 몸 쓸 일이 많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노숙인들이 남긴 음식물 찌꺼기를 치우고, 자고나면 쓰레기가 되곤 하는 종이박스를 개켜 천정 틈에 끼워 넣었다가 '이웃'들에게 다시 나눠주는 게 자신의 소일거리란다.
남들이 꺼려하는 지하도 청소를 자청하다보니 경찰이나 환경미화원들로부터 커피도 얻어 마시는 재미가 있다나.
또다시 조심, 물었다. "설인데, 어찌 이렇게 혼자…"
할아버지의 고향은 호적상으로는 전북 정읍. 하지만 태어난 곳은 일본 오사카이란다. 재일동포가 많은 그곳에서 방직공장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피서를 다녀오다 사고를 당해 저 세상으로 떠난 누이도 용케 기억해냈다.
자손이 있는지를 묻자 "아들딸 하나씩 있지"라고 자신의 직계가족을 소개했다. 답답한 마음에 "왜 자식들과 함께 살지 않느냐"고 묻자 "내가 죄가 많다. 죄가 많아. 더는 묻지 말라"며 남은 홍삼드링크를 마셨다.
새로운 화제를 찾던 끝에 종이박스 밑에 놓인 찬송집이 눈에 들어왔다. 겉표지에 손때가 반들반들했다.
할아버지는 찬송집 한가운데를 펼쳐놓고 "내가 신앙심이 깊다"며 "기억하는 노래는 애국가하고 찬송가뿐"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평소 즐겨 부르는 찬송가는 '나의 죄를 씻기는'이란다.
"어제 무료 진료소에서 나눠준 감기약을 먹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코피가 쏟아지더니 계속 멈추질 않아 찬송을 못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엔 입에서 피도 나오더라고요. 내가 죄가 많으니 죄가 많으니…."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의 인중에 검붉은 피가 조금 고여 있었다. 게다가 종이박스 이곳저곳에 핏자국이 늘어 붙어 있었다.
문득, 할아버지의 건강상태가 걱정됐다. 서울시가 건강상태가 위급한 노숙인에 한해 강제라도 수용을 해 치료를 하려고 계획 중이라고 넌지시 알리자 "뭐 하러 그러느냐. 고맙긴 하지만 이대로 곱게 죽도록 놔뒀으면 한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친 뒤 할아버지가 즐겨 부른다는 찬송가 '나의 죄를 씻기는'을 검색해 보았다.
1절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