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곰국 끓여 놨다, 다녀올게."
모 보험사 CF에는 우리 이웃 혹은 자신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앞으로 5년간은 베이비부머 퇴직자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진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은퇴 공포'를 일상화된 환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이 시기는 박근혜정부의 임기와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새 정부의 핵심 정책이 '고령화 사회'에 대한 사회안전판 마련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제2의 인생' '아름다운 황혼' 누구나 멋진 은퇴를 꿈꾸지만 현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고단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뉴시스는 'R(retire)의 공포가 시작됐다'시리즈를 통해 우리사회 중장년층의 은퇴에 대한 고민을 들어보고 사회 안전망은 어떻게 구축하는 것이 현명할 것인지, 개인적인 고통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은 어떤 것들이 있을 것인지를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1. 대기업의 1차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K씨(56세)는 고민이 많다. 회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굴러가고 있지만 문제는 아이들 교육비다. 캐나다에서 유학 중인 첫째 딸과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막내아들의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들은 은퇴를 고민할 나이지만, 남들보다 늦게 결혼을 한 탓에 아직도 아이들 뒤치다꺼리 할 일이 산더미 같다. 은퇴 후 임대료 수입이나 챙길 요량으로 구입해 놓은 30평대 아파트가 있지만, 몇 년 후 아이들의 결혼자금에 보태려면 팔게 될 지도 모른다. 아이들 돌보느라 개인연금 하나 제대로 들어놓지 못한 K씨는, 갑자기 병이라도 걸려 은퇴를 맞게 되면 어쩌나 불안하기만 하다.
#2. 한 중견 건설업체에서 30년 동안 근무하고 얼마 전 은퇴를 한 L씨(55세)는 현재 빌딩관리 일을 하고 있다. 국민연금 수령까지는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있어야 하고, 마냥 놀 수도 없고 해서 곧바로 일자리를 구하긴 했지만 '내가 꿈꾸던 노후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동안 바쁜 일을 핑계로 친구들과 연락도 자주 못한 탓에 주변에는 비슷한 고민을 나눌 사람조차 없다. 유일한 말상대인 아내는 요새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겠다며 분주해 눈도 마주치기 힘들다. 늦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아내가 대견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미래도 없는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면 씁쓸할 때가 많다.
한국은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빨리 진행되는 나라다. 현 추세라면 우리나라는 2026년 인구의 20%가 고령자인 초고령사회로 접어든다. 5명 중 1명이 노인이라는 얘기다.
정부는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수많은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노년에 대한 불안감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특히 700만명에 이르는 '베이비붐세대(1955~1963년생)'의 본격적인 은퇴시기가 다가오면서 우리 사회의 '은퇴 공포'는 극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자녀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부양 부담까지 짊어지고 있는 이른바 '샌드위치 세대'로, 정작 자신들의 노후는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다.
한때 우리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대접받던 이들이 갑작스럽게 일손을 놓으면서 느끼게 되는 심리적 박탈감도 만만치 않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실시한 저출산·고령화 국민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40~50대의 노후 준비율은 45% 내외에 불과했다. 절반 이상은 노후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가장 큰 공포는 경제력 부재에서 비롯된다. 최근 35세 이상 64세 이하 남녀 3000여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전체 노후준비도는 100점 만점에 평균 59점으로 낙제 수준이었다.
특히 재무 부문에 대한 준비도는 47점으로 낮았고, 10명 중 7명 이상은 현재 갖고 있는 자산만으로는 은퇴 후 생활비를 충당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됐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노후 준비는 대부분 국민연금에 의존하고 있는데, 2011년 전체 가구주 중 국민연금 가입자는 91.8%에 달했다. 반면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에 가입한 비율은 각각 8.3%와 31.3%에 그쳐 재무 상태가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최근 국민연금 고갈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은퇴 공포를 부채질하고 있다.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는 장년층들은 은퇴 후 사회참여나 대인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도시지역 50대 장년층의 여가생활 실태와 정책과제'에 따르면 장년층의 여가활동은 종교모임(49.7%)과 친목모임(34.5%) 중심으로 편중돼 단조롭고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낚시와 등산 등 스포츠 야외활동에 직접 참여(24.9%)하거나, 영화나 연극관람 등 문화예술 활동(19.4%), 교육프로그램 참여 등 자기계발 활동(11%)을 하는 경우는 적었다. 또 50대의 상당수는 자기계발 활동, 사회봉사활동, 정당이나 시민단체 등 단체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의 사례에서도 살펴봤듯이 장년층은 그동안 과도한 업무와 경제적 부담 등으로 제대로 여가를 즐기지 못했다. 은퇴 이후에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간적 여유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다.
올해 새롭게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씩 지급하겠다는 공약에 따라 기초연금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은퇴 공포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은퇴 후 20억원이 필요하다'는 금융회사들의 공포마케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해도, 은퇴를 앞둔 이들이 적어도 자신들의 노후를 자신들의 힘으로 꾸려나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책이 시급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