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 이모(40·여)씨는 몇년 전 호텔 바에서 주문을 받던 중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손님 한명이 자신의 다리에 손을 갖다댔기 때문이다.
이씨는 반사적으로 손을 쳐내며 화를 냈지만 그 남성은 술을 다 마시고 바를 떠날 때가 돼서야 건성으로 사과를 했다.
지금도 당시의 굴욕감과 당혹감이 생생하다는 이씨는 "손님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를 하려면 직장을 그만둘 각오를 해야 한다"며 "감정노동자들의 감정은 세월에 닳아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백화점과 대형할인점 등 줄곧 유통서비스업체에서 일해 온 김모(28·여)씨는 대인기피증이 생겨 직장을 그만두고 1년간 집에서 '은둔형 외톨이'로 지냈다.
김씨는 고객서비스센터에서 근무하면서 매일 수십명의 고객에게 폭언에 가까운 말을 들었지만 싫은 표정 한 번 짓지 못하고 무조건 참아야 했다.
그런 시간이 오래 흐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자주 불안감과 가슴이 답답해지는 통증이 느껴졌고 결국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0여년 동안 유통매장 의류 판매원으로 일해온 이모(35)씨의 증상은 공황장애다. 말도 안되는 일로 손님이 시비를 걸어오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초조해진다.
직장 내에 휴게실 마저 변변치 않다 보니 이씨는 화장실에서 안정제를 먹고 한참 앉아 있는 것으로 겨우 고비를 넘긴다.
◇감정노동자란?
이처럼 타인의 감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감정노동자라고 부른다.
감정노동자들이 주로 일하고 있는 직종은 백화점·호텔·마트 판매직, 승무원, 보험 영업직, 안내데스크 업무, 간호사, 은행원, 텔레마케터, 소비자상담 업무 등이다.
감정노동 분야에는 여성이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고 이들은 고객으로부터의 자극과 위협 속에서도 감정이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를 요구받는다.
이 때문에 감정노동자들은 우울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등 직무스트레스성 직업병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여성 노동자의 산업재해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1995년 여성 노동자의 산업재해 비율은 10.9%에 불과했지만 2010년 19.7%로 급증했다.
반복되는 감정노동은 정신질환, 뇌심혈관계질환, 근골격계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감정노동 종사자의 약 10%가 즉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무례한 고객 이렇게 대처하자
인권위는 최근 여성 감정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성감정노동자 인권 수첩'을 제작했다.
인권 수첩에는 직종별 고객 응대 방안과 여성 감정노동자들이 직장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대처하는 방법 등이 수록됐다.
도소매 마트 판매 직원의 경우 고객이 반말이나 욕설을 할 때는 "우리 마트에서는 직원에게 반말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니폼에 부착된 리본이나 주변의 홍보 게시물을 손으로 가리켜 알려준다.
백화점과 면세점 판매 직원의 경우 고객이 성희롱을 할 때는 고객의 행동이 성희롱에 해당됨을 알린 뒤 침착하고 사무적인 표정으로 불쾌감을 표현한다. 이후에도 고객이 계속 추근거릴 경우 주변의 도움을 청한다.
병원 노동자의 경우 취객·조폭이 막무가내식 행동을 하거나 폭행을 가할 때 주위(청원경찰 또는 동료)에 도움을 요청한다. 폭행이 심해질 때는 환자들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보살핀 뒤 몸을 피한다.
텔레마케터의 경우 고객이 성희롱적인 언어를 사용할 때 성희롱은 현행법 위반임을 알린다. 그럼에도 고객이 성희롱적 발언을 계속할 경우 매니저나 전담팀으로 통화를 전달한다.
전문가가 제안하는 직장 내 스트레스 대처 방법은 ▲적응하기 ▲일과 나와의 분리 ▲혼잣말 ▲분노 조절훈련 ▲생각 멈추기 등이다.
"나는 지금 연극을 하고 있어. 잠시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된 거지"라고 생각하며 일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스트레스 대처법이다.
또 가능하면 긍정적인 해석을 하려고 노력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저 고객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어 화를 낸 것이겠지. 나를 무시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로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혼잣말이 큰 도움이 된다. "이 상황에서 꼭 내가 화를 내야할까? 그만큼 중요한 일인가?"라고 하거나 "화내 봐야 나만 손해지. 그냥 무시하자"며 코웃음을 치면 된다.
해결 방법이 없을 때는 그냥 생각을 중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속으로 '그만' 하고 소리를 지른 뒤 그 고객을 생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상처는 반복해서 건드릴수록 덧나는 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분노를 억누를 수 없다면 적극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이완 호흡'이다. 눈을 감고 3∼4회 정도 깊숙이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