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총제 부활에 순환출자규제 등 연일 계속되는 정치권의 압박에 재계가 고민에 빠졌다. 기업이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정치적 이슈로 부각된 상황이어서 뾰족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그저 불똥이 어디로 튈까 전전긍긍이다.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재벌개혁에 숟가락을 얹은 상황이라 정치권의 공세를 피하고 악화한 여론을 무마할 방안을 마련하려 해도 쉽지 않다. '빵집 논란'에서 이미 확인됐듯 자칫하면 한꺼번에 욕을 먹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언적 수준의 재벌 길들이기 방안들이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거치며 정치적 공약으로 구체화할 경우 대기업들은 그대로 당해야 하는 상황이라 가슴앓이만 깊어지고 있다.
현재로서는 재계 차원의 공동 대응방안 마련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재계를 대변하는 전경련이나 경총 등에서 공동대처하겠다는 소식이 들리긴 하지만 아직 농익은 단계도 아니어서 우왕좌왕 하고 있다.
파상공세를 피하기 위해 총수들의 사재 출연이 잇따를 수 있지만 이는 총수 개인의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라 조심스럽다. 하지만 정치권의 압박이 계속될 경우 대대적인 사재 출연 현상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회공헌 활동은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데 일부 동의가 이뤄지고 있다.
◇"표심 잡기용‥소나기는 피해야"
뉴시스가 2일 재계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한 결과 정치권의 대기업 압박에 대해 대부분 표를 의식한 선거용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일부 기업들에서 벌어진 빵집 논란에 대해서도 억울하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A그룹 한 임원은 "총선과 대선 앞두고 정치권이 대기업을 압박하고 나서는 것은 분명 표를 의식한 것이다"며 "(빵집 논란에서도)우리는 다른 기업과 다른데 같이 묶이고 있어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정치권의 공세를 피하고 여론 무마용으로 따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정치권이든 여론이든) 함께 거론이 안 되기를 바랄 뿐이다"고 덧붙였다.
B그룹 임원은 현재의 상황을 "죽을 맛"이라고 한 마디로 표현했다. 이 임원은 "선거 국면이라 대기업을 자꾸 건드리는 것 같다. 당 강령으로 확정된 것도 아니고 기업이 나설 일도 아니라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개 입장에서는 대응방안을 내놓기 어려워 곤혹스럽다. 그저 재벌 관련 내용을 모니터링 하는 수준이다"며 "당의 강령 등으로 나오면 전경련이나 경총 등이 나서서 할 것이다. 현재는 반론을 제기할 단계도 아니어서 정말 죽을 맛이다"고 언급했다.
또 다른 그룹 임원은 구체적인 대응방안은 마련할 수 없고 그저 지금까지 계속해 온 사회공헌 등을 좀 더 활발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세 대응 어려워‥사회공헌 확대 전망
이 임원은 "정치권의 공세에 대응하기보다 사회공헌을 확대하는 쪽으로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며 "부의 사회 환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이유다. 총수들의 사재 출연은 그룹 차원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C그룹의 경우 매우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최근 타깃 기업으로 자주 거론되자 언급 자체를 꺼리고 있다. 사실상 돌아가는 판세를 보고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정치권이 표심을 얻기 위해 재벌 그룹을 압박하면 오히려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방안이 나왔으면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좀 더 구체화된 방안을 내놔야 대응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D그룹 역시 관망세다. 정치권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고용 창출, 출총제 등 여러 이슈에 대해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
이 그룹 관계자는 "시행 법령이나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되면 기업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적당히 따르겠다"고 밝혔다.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경련 역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대응방안도 중요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소나기가 내릴 때(뭇매를 맞을 때는)는 처마 밑으로 피해야 한다. 괜히 나서서 화를 키울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업도 경제상황이 나빠 어려운데 이런 식으로 가면 고용창출은 어떻게 할 건지 걱정된다"며 "(정치권이)생각이 있어서 하는 것이겠지만 있는 것만 지키면 고용창출은 어렵다. 앞으로 진행 상황을 보고 대응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MB정부 "출총제는 아날로그"‥국민 70%는 찬성
정치권의 재계 옥죄기에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장관들까지 반대 목소리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과 정부가 힘겨루기를 벌이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국무회의에서 "요즘 모든 정치 환경들이 기업을 위축시키고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성장이 줄면 고용이 걱정되는데 기업들을 너무 위축시키면 투자와 고용을 줄일 수 있다"며 정치권의 재벌 압박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 대통령이 반대 의사를 표시한 직후 장관들도 잇따라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재벌정책을 관장하는 양대 축인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출총제는 아날로그방식의 획일적인 제도여서 실익이 없다"며 정치권에 직격탄을 날렸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도 30일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법이나 제도로 국제표준보다 과도하게 대기업을 규제하거나 제한하는 것은 한국 경제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에둘러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는 야당이 최근 출총제 부활을 연일 언급하며 대기업의 골목상권과 중소기업 영업 침해 등을 규제할 수단으로 삼으려는 데 제동을 걸기 위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재벌 규제로 이를 해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시선은 MB정부나 재계의 시각과 다르게 흐르고 있다. 국민 10명중 7명은 정치권의 재벌개혁에 동의하고 있었다.
내일신문이 지난 1일 전국 성인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부활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전체의 69.7%로 나타났다. 민주통합당이 제안한 재벌세에 대해서도 동의한다는 응답이 반대(22.6%)의 3배가 넘는 70.3%에 달했다.
결국 재계와 정부만 반대하고 국민 대다수는 찬성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당 내에서도 현 정부의 발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이 대통령이 상황인식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종인 한나라당 비대위원은 경향신문과 통화에서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도 밤낮 기업을 편리하게 해줘 성장시켜야 한다고 하다가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며 "대통령이 아직 상황 인식을 잘못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연일 공세를 늦추지 않는 정치권과 맞불을 놓는 정부, 그 속에 끼인 재계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불신이 한데 뒤엉킨 상황에서 재계가 어떤 대응책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