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 대목은 이제 옛 말입니다. 이제 힘들다고 말할 힘조차 없어요."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사흘 앞둔 지난 18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 시장. 목도리와 두꺼운 외투 등으로 중무장한 상인들은 차가운 칼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좌판을 벌여놓고 물건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명절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시장 안에는 흥정하는 소리도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손님 맞을 채비를 끝낸 상인들은 간간히 보이는 손님들이 무심한 듯 지나가자 이내 쪼그려 앉아 추위를 달랬다.
물가가 크게 오른데다 어려워진 경제상황으로 시민들의 발길이 뚝 끊겨 시장 골목마다 적막감이 감돌았다. 시장 골목안에는 간간히 지나가는 외국 관광객들만 있을 뿐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재래시장만의 독특하고 활기찬 웃음보다는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고 있는 물가 탓인지 시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만이 남대문시장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 했다.
치솟는 물가와 경제불황은 남대문시장 영세 상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직격탄이나 다름이 없었다.
"두꺼운 겨울 바지가 단돈 9000원입니다. 구경만이라도 하세요."
시장에서 10년째 바지 노점상을 하는 김모(58)씨에게 설 대목인데 장사 잘되느냐는 질문에 애꿎은 담배만 연신 피워댔다.
김씨는 "오전 7시부터 나왔는데 평소 2만원에 팔던 바지도 9000원까지 가격을 내렸는데 단 한장도 팔지 못했다"며 "남대문시장에 명절 대목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최근에는 하루 종일 장사를 해도 바지 한장 팔지 못할 때가 많단다.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갈 때 마다 가족들 볼 면목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인근에서 20년째 땅콩과 아몬드 등을 취급해온 김정원(42)씨는 "설 대목인데도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다"며 "한달 월세만 150만원인데 다음달은 어떻게 넘길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TV와 신문에서 대형마트는 손님들로 북적인다고 나올 때 마다 씁쓸하다"면서 "제대로 된 주차장도 하나 없는 재래시장에 이 추위에 누가 오겠냐"며 반문했다.
20년째 생선 등 해산물을 팔고 있는 성우철(57)씨는 "설 특수를 기대하며 잔뜩 쌓아놓은 해산물이 애물단지로 전락할 정도"라며 "장사도 안 되고 고생만하는 것 같아 이제는 그만 둬야할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시장에서 간간이 보이는 주부들도 높은 물가가 부담스러운 탓인지 대부분 물건을 들었다 다시 내려놓거나 값을 물어보고 이내 발길을 돌렸다.
평소에도 전통시장을 많이 찾는다는 이혜운(46·여)씨는 "현금 20만원을 들고 나왔는데 과일이랑 돼지고기정도 샀는데 벌써 지갑이 비어버렸다"며 "물건 하나 하나 살 때마다 손이 떨릴 정도"라고 토로했다.
제수용품을 사러 나온 권숙영(48·여)씨는 "이번 설 명절에는 간소하게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눈 깜박할 사이에 벌써 30만원 가까이 썼다"며 "주부입장에서 아무래도 경기가 어렵다보니 조금이라도 아껴야 하는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설을 준비하는 손님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던 한복과 아동복을 판매하는 상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40년간 한복을 팔고 있는 임삼순(75)씨는 "10년전에 비해 매출이 10분의 1로 줄었다"며 "그나마 설이라고 조금 팔리긴 하지만 대부분이 아이들 한복이나 개량 한복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싸고 좋은 물건을 갖다 나도 사는 손님이 없어 무용지물"이라며 "설 대목이나 평소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덧붙였다.
10년째 아동복을 팔고 있는 장성철(46·여)씨는 "올해는 지난해 설과 비교해 매출이 한 30%는 줄어들 것 같다"며 "단골손님들 아니면 묻을 닫아야 할 정도로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고 손사래를 쳤다.
설 대목을 앞두고 상인과 손님의 흥정으로 시끌벅적해야 할 남대문시장.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상인들과 제수용품을 사러 나온 손님들이 뒤엉켜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여야할 이곳에는 두툼한 외투로 중무장한 상인들만이 삼삼오오모여 찬바람을 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