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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아이즈]칼럼 '고봉진의 에세'-공자의 직(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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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아이즈]칼럼 '고봉진의 에세'-공자의 직(直)
  • 수필문우회 회장·뉴시스 상임고문
  • 승인 2011.12.0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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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헌문편 (憲問篇)〉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以德報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덕으로서 원한을 갚는다면, 덕은 무엇으로 갚겠느냐? 원한은 바른 것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以德報怨 何以報徳 以直報怨 以徳報德)”고 했다. 이야말로 현실에 입각한 균형감각 이 잡힌 답변이다. 공자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스승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때 공자가 ‘바른 것(直)’으로 원한을 갚는다’고 표현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다. 확실한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원한은 원한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점뿐이다.

위 문답을 《노자》 제63장에 나오는 “성인(聖人)은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報怨以德)”는 말에 대한 공자의 견해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보원이덕(報怨以德)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 여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덕행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현실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사이에 행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그런 행위를 선(善)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권장한다면 오히려 사회의 기존 질서와 가치체계를 무너뜨릴 가능성마저 대두한다.

《논어》〈안연편〉에서 “바른 것을 올려서 이것을 굽은 것 위에 놓으면, 굽은 것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고 공자는 말했다. 정직한 사람을 발탁하여 높은 자리에 앉히고 그 밑에 성정(性情)이 굽어 있는 사람을 놓아두면 그들까지 정직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때의 바른 것은 공중 앞에서 정직한 것이다. 한편 자로(子路) 편에서는 섭공(葉公)이 자기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정직해서,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친 것을 아들이 밝혀 죄를 받도록 한다고 자랑을 하자, 공자는 자기 고장에서는 그와는 달리 아비는 아들을 위해 감추어 주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감추어 주는데, 그 가운데 바름(直)이 있다(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고 했다. 이 경우의 바름이란 공중 앞에서 정직하다는 것하고는 거리가 있다. 법치를 주장하는 법가의 정직함과 법보다 예를 더 존중하는 유가의 정직함이 서로 충돌한 경우로 해석된다.

직(直)에 대한 공자의 견해는 그 밖에도 몇 군데 더 나온다. 직(直)이란 글자의 회의(會意)를 보면 많은 눈이 보고 있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상태, 즉 자기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천륜으로 맺어진 정에 이끌려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보면 정직하지 못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 편이 오히려 더 자기를 속이지 않는 자연스럽고 바른 행위가 된다고 본 것이다.

법가의 대표적 저서 《한비자》 〈제49 오두(五蠹)편〉은 이러한 이론 상의 혼란을 꼬집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와 평을 싣고 있다..

“초나라 사람으로 직궁(直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비가 양을 훔쳤다. 그는 이를 관가에 고발했다. 그러자 영윤(令尹)은 그 자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임금에게는 바른 일은 했지만 아비에게는 그릇된 짓을 했으니 잡아서 죄를 준 것이다. 이를 살펴볼 때 그 임금의 바른 신하는 그 아비의 포악한 자식이 된다(楚人有直躬 其父窃羊 而謁之吏 令尹曰殺之 以為 直於君、而曲於父 執而罪之 以是観之 夫君之直臣父之暴子也).”

법가의 입장에서 보면 공자가 주장한 직(直)은 무엇보다도 질서가 중요한 나라 의 정치에 혼란만 초래하는 곡설(曲說)이 된다. 그래서 법가의 설을 채택한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자 분서굉유를 자행한다. 그러나 한대(漢代)에 이르면 공자의 직(直)을 법치에 반영을 하여 ‘용은(容隱)’이란 제도를 도입한다. 직계 존, 비속의 경우 서로 죄를 숨겨 주어도 벌하지 않는 예외 규정을 둔 것이다.

우리가 바른 것을 추구할 때도 언제나 그것보다 더 근본이 되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더 앞서는 대의(大義)는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54호(12월5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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