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한 해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여 시행 중인 '수산물 이력제'가 유명무실 할 정도로 부실하게 운영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혈세 낭비의 전형적 유형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05년 국내산 장어에서 발암물질인 말라카이트 그린이 검출되자 선진국에서 시행 중인 수산물 이력제를 조기 도입했다. 이를 통해 국산으로 둔갑한 수입수산물을 가려내고, 안전사고 발생시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시행 9년째인 올해 업체 참여율은 한자리 수에 머물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수산물 이력제에 참여한 업체(생산·가공·유통·판매)는 총 4426곳으로 전체 대상업체(9만7081곳)의 6.9% 수준에 그쳤다.
업체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매년 평균 16억원 상당의 예산을 투입해 포장제 구입비와 컨설팅교육 비용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쇠고기 이력제처럼 의무제가 아닌 자율 참여제인데다 이력 관리에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정작 등록 업체에 대한 제품 안전성이나 원산지 진위여부, 유통경로 등에 대해서는 관리가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업 참여를 꺼리는 업체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제대로 된 관리감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농수산물품질관리법에 의해 이력추적관리에 허위 표시 등을 했을 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법 조항이 마련돼 있지만 수산물 이력제 사업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2008년 이후 아직까지 단속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농식품부 관계자 "위변조를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쇠고기처럼 비싸지 않은 수산물을 누가 위변조하겠느냐"며 "올해 사업자 선정기준도 참여 업체를 확대하기 위한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고려해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수산물 이력제가 원산지를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등록업체가 자율적으로 개체 식별 번호를 생성할 수 있고, 유통되는 물량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국내산 수산물로 둔갑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점은 2011년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다. 당시 농림수산식품위원회가 "수산물 이력제의 핵심인 바코드 라벨이 손쉽게 위조와 복제가 가능하다"고 지적했고, 서규용 전 농식품부 장관은 "라벨 복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개선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같은 문제점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담당부처인 농식품부가 '안전한 먹을거리'라는 본래 취지보다는 등록 업체를 늘리기에만 급급해 과연 실효성이 있는 건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비자가 안심하고 수산물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수산물 이력제의 본래 의미가 퇴색됐다"며 "현 상태에서의 수산물 이력제는 예산 낭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들 입장에서 수산물 이력제는 결국, 투명한 유통경로를 통해 수산물의 안전성이 보장된다는 의미"라며 "단순히 유통과정을 표시하는 것보다 철저한 관리감독으로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