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년보다 이른 기록적인 폭염(暴炎), 치수(治水) 한계를 초월한 ‘극한 호우’ 등이 번갈아 이어지며 과일·야채·육류 등 장바구니 물가가 무서운 속도로 치솟고 있다. 급변하는 날씨가 농축산물 생산을 교란하고 전체 소비자 물가를 밀어 올리는 ‘기후플레이션(Climateflation │ 기후 + 인플레이션)’은 이제 일상처럼 ‘뉴노멀(New normal │ 새로운 표준)’로 자리 잡았다. ‘기후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유럽중앙은행(ECB)이 2022년 공식 문건에서 처음 언급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ECB는 지구 온난화와 기후 이상 현상이 중장기적으로 물가에 구조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진단했고, 이후 IMF, OECD, UN 등 주요 국제기구도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장마도 없이 지난 6월부터 시작한 때 이른 폭염(暴炎)이 연일 맹위를 떨치며 기승을 부렸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 7월 2일 오전 10시 기준 전국 183개 기상특보 구역 중 174곳에 ‘폭염 특보’가 발효돼 전국의 95.08%가 ‘가마솥 무더위’에 휩싸였다. 폭염주의보가 97곳, 폭염경보가 77곳에 이르렀다. 이어서 바로 들이닥친 ‘극한 호우’로 농작물이 2만 9,948㏊(축구장 약 4만 1,000개 넓이)가 침수 침수되고 닭 145만 마리 등이 폐사하는 등 큰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7월 22일 발표한 ‘21일 기준 호우 시ㆍ군별 피해 현황’을 보면 농작물 침수는 2만 9,448ha, 농경지 유실·매몰은 250ha를 기록했다.
농작물 품목별로 살펴보면 벼가 2만 5,517.0ha로 가장 피해가 컸고 논콩 2,108.4ha, 고추 343.7ha, 딸기 162.0ha, 멜론 144.8ha, 대파 132.2ha, 수박 132.1ha, 포도 104.9ha 순으로 피해를 봤다. 이어 쪽파 95.2ha, 참깨 84.2ha, 토마토 73.3ha, 배 65.7ha, 부추 45.5ha, 오이 43.0ha, 복숭아 31.7ha, 애호박 31.5ha, 상추 30.6ha, 쌈배추 30.0ha, 블루베리 29.7ha, 가지 27.6ha, 들깨 26.2ha, 사과 23.9ha, 참외 21.1ha, 화훼 17.5ha, 방울토마토 17.0ha, 무화과 13.0ha, 배추 10.1ha, 깻잎 10.1ha 순으로 피해를 봤다. 특히 벼의 침수 면적(2만 5,517㏊)이 커, 가을 이후 쌀 가격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다. 가축은 한우 588두, 젖소 149두, 돼지 775두, 닭 145만수, 오리 15만 1,000수, 메추리 15만수, 염소 96두, 꿀벌 2,271군의 피해를 봤다. 이번 피해 현황은 지자체 초동조사 자료이며 향후 피해 현황은 조사 과정에서 변경될 수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번 호우 피해로 일부 농축산물이 공급이 감소해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고 할인 지원, 생육ㆍ사양 관리 강화 등을 통해 수급 불안을 최소화한다는 계획이다.
‘극한 호우’를 쏟아붓던 장마가 끝나자마자 이번엔 또다시 ‘이른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장마가 끝난 직후부터 기온이 치솟으며, 서울의 낮 기온은 이틀째 30℃를 훌쩍 넘어섰다. 삼척 등 강원 동해안은 35.7℃까지 치솟았고, 복구 작업이 한창인 경남 산청과 경기 가평 등의 기온도 30℃를 웃돌았다. 무더운 북태평양 고기압이 전국을 완전히 뒤덮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폭우에 연이은 폭염까지 ‘이중고’에 시달리고, 복구가 진행 중인 지역에 추가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특히 더위에 약한 잎채소류 가격이 오르고 있고, 육계와 산란계 폐사가 이어지면서 닭고기와 달걀 가격 또한 심상치 않다. 무엇보다 작황 부진으로 농산물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지난달 생산자물가지수가 석 달 만에 다시 올랐다. 여기에 이달 폭염과 폭우 등 기상이변까지 겹치면서 향후 농수산물 가격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7월 22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19.77(2020년=100)로 전월보다 0.1% 상승했다. 생산자물가는 지난 2~3월 강보합 수준을 나타내다 4월(-0.2%), 5월(-0.4%) 하락한 이후 석 달 만에 상승했다. 특히 농림수산품 가격이 전월보다 0.6% 오르면서 전체 물가를 끌어올렸다. 공급 물량이 줄면서 축산물(2.4%)과 농산물(1.5%) 가격이 모두 상승한 영향이 컸다. 구체적으로 시금치(43.5%), 배추(31.1%)가 특히 큰 폭으로 뛰었고 상추(11.6%), 돼지고기(9.5%), 달걀(4.4%) 등 가격도 줄줄이 상승했다. 배추는 봄배추 출하 시기가 늦어진 데다 고온 현상과 병해까지 겹쳐 작황이 부진해지자 가격이 급등했다. 돼지고기의 경우 조업일수 감소로 도축량이 줄었고 달걀 역시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올해 7월 초 이례적인 폭염에 이어 기록적인 폭우의 영향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는 중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 7월 18일 기준 수박 한 통의 소매 가격은 전년 대비 44.7% 오른 3만 866원으로 조사됐다. 8월 중순 이후까지 폭염이 계속되면 피해는 훨씬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 분석 결과 일시적으로 기온이 평년보다 1℃ 오를 때 농축산물 가격은 최대 0.4~0.5%포인트 상승한다. 밥상 물가가 비정상적으로 오르면 가계 소비 여력이 제한되는 등 국민경제 전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기후변화로 인해 물가가 오르는‘기후플레이션(Climate + Inflation)’ 현상이 올해만의 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국내 평균기온은 2010년대 이후 상승 속도가 가팔라지는 중이고, 거의 매년 이상기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후플레이션’은 한국만의 일도 아니어서, 수입 의존도가 높은 곡물의 국제 작황이 이상기후 탓에 교란되는 일도 빈번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날씨가 더워졌다고 가격이 오르는 것이 아니다. 가뭄, 폭염, 홍수, 이상기후 등으로 농작물 수확량이 감소하고, 에너지 수요가 증가하면서 생산과 유통 전 과정에 걸쳐 물가 상승 요인이 작용한다. 기후 위기로 비슷한 문제가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매우 큰 만큼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
일반 가정집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겠지만 특히 취약계층 식사를 책임지는 단체들의 시름은 더 깊어진다. 경기 불황으로 후원이 크게 줄었는데 가파르게 오른 물가까지 감당하기 쉽지 않아서다. 전문가들은 취약계층에 대한 부양책임을 자선단체 중심에서 국가 중심으로 바꿔야 할 때라고 말한다. 결론은 앞으로 농축산물 수급 및 물가 관리는 이상기후가 ‘상시적’이라는 점을 상정한 상태에서 ‘선제적’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정부는 농산물 수급 및 물가 정책을 짤 때 이상기후를 ‘상수’로 설정하고, 농업과 유통업의 기후변화 대응력을 키울 수 있도록 중장기 근본 대책을 ‘선제’ 강구를 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달라지는 기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품종을 서둘러 개발하고,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농업 형태 등을 지속 연구·개발해야 한다. 동시에 농산물 유통체계 효율화 노력도 함께 이어져야만 한다. 농축산물 가격 급등에 즉각 대비하기 어려운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도 잊어선 결단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