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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기상천외한 국회, 앞으로도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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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기상천외한 국회, 앞으로도 이어질까
  • 우은식 정치부 기자
  • 승인 2011.11.23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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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를 찔렸다."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강행 통과된 후 한 야당의원이 한 말이다. 그러나 허를 찔린 건 야당 의원뿐만 아니다.

대부분 기자들도 이날 한미FTA가 이 처럼 전광석화처럼 처리될 지 예상치 못했다. 국회 본회의가 24일 예정돼 있었고, 12월 예산안 처리를 감안하면 강행처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여야 원내대표가 협의를 통해 의사일정을 조정하도록 한 국회법 제77조(의사일정 변경) 규정이 있기 때문에 휴회 중 본회의가 열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다.

그러나 '국후 복기'를 해보니 여러가지 징후가 있었음이 뒤늦게 확인된다. 한나라당 한 핵심관계자는 22일 낮 기자들과 가진 오찬모임에서 한미 FTA 처리와 관련 "시간이 늦어지면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라며 "이달 안에 처리 못하면 홍 대표가 내기에서 지는 것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홍 대표가 최근 사석에서 "한미FTA를 이달 안에 처리를 못하면 100만원을 주고, 통과되면 아구창을 날리겠다고 한 기자와 내기했다"고 구설수에 오른 내용에 대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졌다.

홍 대표는 그러나 22일 오후 소집된 예산안 의원총회에서 "오늘 의총이 얼마나 중요한 의총인데…"라며 유난히 의원 참석률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홍 대표는 이날 의총에서 의원 전원 소집을 지시했고, 저녁 약속을 모두 취소하라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오후 3시가 되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갑자기 의총을 중단하고 일사분란하게 본회의장으로 진입했다. 박근혜 전 대표도 본회의장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의원들과 함께 입장했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이후 경호권을 발동했고, 직권상정을 위해 한미FTA 비준안과 이행법안 등 17개 안건에 대한 심사기일을 오후 4시까지로 지정했다.

여당의 강행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본회의장으로 입장한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은 미리 준비한 최루탄 한 발을 터뜨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도 일으켰다.

본회의장 사회권을 넘겨받은 한나라당 정의화 부의장은 의결로 본회의 비공개를 결정했다. 국회법 75조에 따르면 본회의는 공개한다고 돼 있다.

다만 의장이 제안해 본회의의 의결이 있는 경우,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협의해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한해 비공개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비공개로 의결된 국회 본회의에는 기자석의 출입이 금지되고, 의사 속기록도, 표결결과에 따른 찬반의원 명단도 알려지지 않는다.

이날 우여곡절 끝에 기자들이 방청석을 통해 본회의장 상황을 볼 수 있었지만, 국회사무처는 기자들의 찬반 표결결과 공개를 거부했다.

오늘 상황이 국회법이 정한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할 만한 상황이었을까. 얼마전 무소속 강용석 의원 제명안이 국회 본회의 표결처리 과정에서 등장한 비공개 결정이 이날 재연됐다.

국회에서 여야가 불문율처럼 지키는 관례가 있다. 여야가 아무리 대립하더라도 국회 원구성 협상이나 국회법 처리 등은 여야 합의로 처리해 왔다.

대정부질문, 본회의 개최일자 등을 정하는 의사일정의 경우 여야 원내대표간 합의를 통해 결정돼 왔다.

여야의 주장이 다르긴 하나 이날 본회의 개최로 인해 의사일정에 관한 여야간 합의존중의 전통이 깨진 것 만큼은 분명하다.

그동안 우리 국회에서는 쇠사슬과 해머가 등장했었고, 의장석 단상 점거를 위해 고지전을 방불케하는 육탄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본회의장 점거농성을 하면서 불침번을 서기도 하고, 본회의장 잠입을 위해 전날밤 남몰래 배낭을 메고 들어가 아무도 없는 본회의장에서 홀로 밤을 지새운 의원까지 있었다.

군사작전을 하듯 육탄조, 방어조 등 조별 편성이 이뤄지기도 하고, 시뮬레이션 연습과 도상 훈련까지 준비하다 언론 카메라에 잡힌 일도 있다. 실제로 전투 지휘 능력을 갖춘 장교 출신 의원들이 작전을 짜기까지 했다.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때에도, 2005년 10월 사립학교법 직권상정 처리시에도, 2009년 7월 여야 의원들간 난투극을 벌였던 미디어법 처리 때에도 기자는 당시 현장에서 취재했었다.

여야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에도 기자들의 본회의장 기자실 출입을 제한하는 비공개 결정을 내리거나, 기습적인 의사일정 변경은 없었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지난해 6월 18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취임사에서 "국회 운영의 험로가 있을 때마다 22년 의정경험을 통해 터득한 노마지지(老馬之智; 늙은 말이 큰 길을 찾는다)를 발휘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굳건히 나가겠다"고 밝혔다.

전광석화 같은 의사일정 변경, 무더기 직권상정, 사회권 이양, 본회의 비공개 진행 이외에 다른 '노마지지'는 없었을까.

야당은 양보할 수 없는 대여 투쟁전선을 마련해 놓고, 여당 지도부의 운신 폭을 좁혀 어쩔 수 없이 강행처리를 사실상 유도한 것은 아닐까.

우리 국민들은 언제까지 이 처럼 기상천외한 국회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지 착잡하고 답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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