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 변호사, 교수, 종교인, 언론인, 예술인 등 6대 전문직 종사자들의 성범죄(성폭력, 성매매, 성풍속)가 연간 400건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이 9월25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 성범죄 혐의로 검거된 6대 전문직 종사자는 2132명으로 집계됐다.
범죄 유형별로 살펴보면 강간 및 강제추행은 1137명, 성매매·알선·중개 499명, 간통249명, 음화(음란물)제조 및 반포 124명, 몰카촬영 81명, 통신매체이용음란 23명, 공연음란 17명, 성적목적 공공장소 침입 2명으로 조사됐다. 직업별로는 의사가 739명으로 가장 많았고, 종교인(578명), 예술인(492명), 교수(191명), 언론인(100명), 변호사(32명)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끊이지 않는 고위층의 성범죄
타의 모범이 돼야 할 ‘성공남’의 성범죄는 어처구니 없게도 사회적 약자들, 특히 자신이 ‘생사여탈권’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다.
박희태 전 의장의 성추행 피해자는 노동조합도 결성할 수 없는 개인사업자로 분류된 캐디였고, 전 검찰총장의 성추행 피해자는 그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골프장의 프런트 계약직 여직원이었다. 송모 사단장의 성추행 피해자는 여군 부사관이었으며, 여러 교수의 성폭행 피해자는 제자들이었다.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사회가 자유화, 민주화 하면서 옛 권위주의 시대에는 감히 드러날 수 없었던 고위층의 을에 대한 ‘성적 갑질’이 여과 없이 공개되고 있다.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의 발달도 사건이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국민들의 의식은 깨어나고 있지만, 성추행을 자행한 인사들, 그러니까 고위층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아직 과거의 ‘냉동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방증이 사태가 불거진 뒤 그들이 늘어놓은 변명들이다.
박 전 의장은 “내가 딸만 둘이다. 딸만 보면 예쁘다, 귀엽다고 하는게 내 버릇이다. 그래서 귀엽다는 의미로 손가락 끝으로(캐디의) 가슴 한 번 툭 찔렀을 뿐이다. 정도를 넘지는 않았다”는 말을 언론 인터뷰에서 서슴지 않았다. 전 국립의료원장은 경찰 조사에서 “오랜 만에 만나 반가워서 뺨에 뽀뽀를 했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레슨을 받는 제자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징역형을 살게 된 정모 교수는 “제자들의 자세를 교정하고 박자를 맞추기 위해 엉덩이를 두드리거나 배를 만진 것으로, 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레슨 방법의 하나다.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던 중 나온 행위”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특권 의식에 젖어서 나온 행동들”이라고 비판한다. 즉,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로 볼 때 그 정도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또 “예전에는 여성들이 참고 넘어갔던 일들이 시대와 의식 변화에 따라 터져나오고 있다”고 봤다.
법무법인 디딤돌 박지훈 변호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나는 (그런 짓을)해도 되겠지’, ‘이게 무슨 추행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거의 다 추행이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피해자 기준대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며 “예전에는 성추행을 당한 여성들이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신고하고 있다. 성폭력을 당했던 당시에는 그냥 참고 넘어갔지만, 피해자들의 의식 수준도 많이 발전하면서 ‘참을 일이 아니겠구나’고 판단해 1년이 지난 지금 고소를 하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강제추행죄가 친고죄라서 6개월이라는 고소 기간의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6월 친고죄가 폐지된 데 따라 고소 기간이 늘어나면서 그 이후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요즘 뒤늦은 신고가 이뤄지는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신고가 이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여군을 상대로 하는 성폭력의 경우 2010년 13건에 불과했다가 2011년 29건, 2012년 48건, 2013년에는 59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올해는 8월 말까지 34건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면서 “과거에는 폐쇄적인 군 문화, 남성 중심 조직 등으로 인해 피해자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숨겨왔던 것이 표면화 하는 것이다. 군내 인권의식이 높아질수록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최근 5년간 총 183건의 피해가 집계됐다는 것은 아직 많은 여군이 피해를 참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어서 안타깝다”고 짚었다.
건국대 경찰학과 이웅혁 교수는 “‘만진 것이 아니고 건드렸을 뿐이다’, ‘툭 쳤을 뿐이다’ 등의 변명으로 볼 때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고위층들은 심한 인지 왜곡 현상을 겪는 듯하다. ‘나는 성추행을 한 것이 아니다’고 스스로 믿는 것이다. 그래야 죄책감이 안 생기기 때문이다”며 “심지어 아동 성추행범도 ‘나는 아이를 예뻐해 준 것에 불과하다’, ‘아이가 일정한 성교육이 필요해서 내가 그렇게 해 준 것이다’고 주장하는데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것들 모두 분명히 성추행이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특히 성추행의 4대 유형 중 하나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위권을 행사하면서 왜곡된 성적 만족감을 느끼는 형태’인 권력형이 있는데 고위 공직자 등 이른바 갑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성추행은 ‘내 권력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내가 이런 행위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고 판단하면서 저지르는 것인 만큼 그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더불어 검찰, 군, 대학 등 상명하복적이고 폐쇄적인 조직 문화 아래에서 성범죄가 빈발하는 것을 볼 때 각 사건들을 개인적인 일탈 행위로만 볼 것이 아니라 조직의 문제는 없는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반성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갑의 성적 횡포가 오히려 처벌 수위가 약하다?
더 큰 문제는 뜻밖에 약한 처벌 수위다. 일반 형법상 강제추행죄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1500만원 이하 벌금인 반면, 성폭력특별법 상 업무상위력등에의한 추행죄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불과하다.
미성년자까지 성추행한 정모 교수에 대해 재판부가 “피해자들이 피고인의 행동에 수치심, 공포심, 혐오감을 느꼈다고 진술하고 있고, 범죄 장면 촬영 영상물에 의하면 피고인이 피해자들의 바지에 손을 넣어 잡아당기면 뒷걸음치는 등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한 ‘위력에 의한 추행’에 해당된다. 20세도 되지 않았거나 20세 초반에 불과한 여성 제자들을 실력 향상이라는 명목으로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행한 점, 자신이 행한 추행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레슨 방법의 하나라고 주장하며 전혀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피고인의 죄질은 매우 무겁다”고 판시하면서도 징역 1년6월,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80시간을 처하는 데 그친 것도 강제추행죄가 아닌 업무상위력등에의한 추행죄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박 변호사는 “업무상 관계에 있어서 추행하는 경우를 성폭력처벌 등에 관한 법 등에서 처벌하고 있다. 그러나 형이 좀 낮다. 2년 이하의 징역이나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반면 일반 형법상 강제추행죄는 10년 이하의 징역이고 1500만원의 벌금이다”며 “업무상 관계에서 하급자인 피해자가 상급자인 가해자로부터 받게 되는 심적인 압박 강도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가중처벌을 해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형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