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7일 오후 9시께 현대자동차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된 최병승(38)씨와 비정규직노조 사무국 천의봉(33)씨가 울산 북구 현대차 정문 주차장 인근 45m 높이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요구사항은 '회사가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관련법에 따라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 이들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내려오지 않겠다'면서 철탑에 밧줄로 몸을 묶고 강제 진압에 대비해 분신할 때 쓸 시너까지 준비했다. 회사 용역경비원이 최씨 등을 잡기위해 철탑에 올라오자 실제 시너를 몸에 끼얹기도 했다.
최씨는 2005년 현대차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파업에 참여했다 해고된 후 7년에 걸친 소송 끝에 지난 2월 대법원에서 "현대차의 사내하청은 불법파견. 최씨는 이미 회사 직원"이라는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 8000여명이 정규직이 될 수 있는지 내다볼 수 있는 일종의 시험 케이스다.
그러나 최씨는 대법원 판결 이후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복직결정까지 받았지만 회사가 재차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최씨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대법원이 불법파견을 확인해줬고 국정감사도 3번 이뤄졌지만 변화된 것은 없다.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아 답답한 심정으로 이렇게 올라왔다"면서 "법원 판결이 최소한 사회를 운영하는 기준인데 그 대법원 판결과 법에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를 하는데 법조차도 회사가 안 지키면 저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호소했다.
최씨를 비롯한 회사 비정규직(사내하청) 노조는 잔업 거부와 파업 등을 통해 불법파견 인정과 정규직화를 요구해왔다. 하지만 회사가 8년만에 사내하청 노동자 8000여명 중 3000명만 신규 채용하겠다는 대안을 내놓자 전원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극한 갈등을 빚어왔다.
고공농성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는 극한의 투쟁수단이다. 그럼에도 최씨를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노동계는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라고 답한다.
노동계에 따르면 고공농성을 택하는 이들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자, 특수고용노동자 등 노동기본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사측을 협상장에 끌어낼 수단을 갖지 못한 것이 특징이다.
조정과 대화를 유도해야할 정부는 개별 기업의 문제이라는 이유로 뒷짐만 서고 있거나 불법이란 이유로 진압에 나서기 일쑤다. 때문에 노동자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사측을 압박하는 게 전부다. 하지만 일반적인 투쟁은 세간의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고공농성과 같은 극단적인 수단이 동원된다.
한진중공업이 그예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조선소내 35m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 농성을 벌이기 전까지 사측은 노조의 정리해고 철폐 요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공농성 끝에 여론이 움직여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국정감사에 불려나온 뒤에야 정리해고자 복직이라는 타협안이 나왔다.
이런 이유에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타워크레인기사노조, 건설플랜트노조, 코오롱, 코스콤 비정규직 노조, KTX승무원,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 로케트전기 해고자, 쌍용차 등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크레인과 철탑, 굴뚝, 광고탑 등에서 아찔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