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로 4·11 총선이 50일 남은 상황에서 최대 승부처를 부산으로 손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최근 20여년 간 선거역사 동안 이 지역의 정치적 과실을 독점한 새누리당은 물론 '텃밭'의 새주인을 꿈꾸는 민주통합당에게도 부산은 경남과 더불어 4·11 총선의 사활을 건 대회전의 현장이다.
이 모든 것이 '노무현 효과'라는데 이견을 다는 이들은 많지 않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에게 노무현이란 이름 석자는 각기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전자는 비극적인 죽음을 택한 그를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 두려고 하고, 후자는 무덤 속의 그를 끊임없이 호명하고 있다.
뉴시스는 지난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 동안 4·11 총선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부산을 찾아 유권자들의 민심을 들어봤다.
지난 17일 밤 부산 사상구 괘법동의 한 주점.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점 한구석에서 30대 초반 남성 3명이 롯데 자이언츠의 일원으로 활약하다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한 이대호의 스프링캠프 활약상을 안주 삼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대호의 이름은 금방 주변 테이블로 전염됐다. 너나할 것 없이 무려 1시간 여 동안을 이대호로 중심으로 야구얘기에 몰입했다.
이야기의 풀이 죽을 무렵 젊은이들에게 겸연쩍게 노무현의 의미를 물었다. "짠하다"는 말이 연신 되돌아왔다. 총선에서 의미를 묻자 "그건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8일 새벽 부산 북구 덕천동로터리 인근 옥천사우나. 목욕을 마친 50~60대 남성 3명이 휴게의자에 앉아 역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즌도 아인데 벌써부터 무르팍이 아프믄 우야꼬." , "누꼬?" "정대혀(현)이, 거 알(아래)로 떤지는 아." , "그리 스카우트 하지말랬재! 우짜노."
총선이 50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며 정치얘기를 묻자 "그건 뭣하러 묻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택시운전사 박민석(70)씨는 비교적 솔직하게 부산 민심을 전했다. 자신을 경북 출신이라고 소개한 그는 부산 시내를 오가는 손님들 얘기를 전했다.
"총선얘길 들으면 XXX이 욕 엄청 많이 한다. 선거철만 되면 이사와 살고, 주소만 옮겨놓는다고 한다고 말이다."
"중앙에서는 꽤 거물이다." , "중앙에서나 거물이지 여긴 아니다."
박씨가 전하는 부산민심은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로 인해 크게 악화됐단다.
"부산시장 봐라 무능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신공항 그것 하나 유치 못하고…. 부산이 명색이 제2도시인데, 국제도시 위상 만들려면 공항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나는 공항청에서 일하다 왔는데 김해공항은 공군기지나 마찬가지다. 허브공항이 안 된다. 이유는 관제를 군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군인들 가지고 글로벌이 되겠는가. 신공항 재추진을 원한다. 영종도 공항 들어서고 인천이 부산보다 나아졌다고 한다. 김해공항은 규제가 많아 더는 안 된다."
"MB는 실용적인 사람 아닌가. 왜 (동남권 신공항)안 할려고 했는지를 봐야지 않겠는가. 수지가 안 맞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지, 4대강 하느라 공항 못 지은 거지." , "국익을 위해서라하지 않는가…"
"말도 안 된다. 부산이 발전하면 그게 국익 아닌가. 지금은 비행기 큰 것이 못 들어온다. 공군이 관제하는 데서는 안 된다. 부산저축은행도 더 깊게 만든 게 다 지들이 해쳐먹어서 아닌가. 4대강으로 건설경기 살린다고 하더니 뭐 살렸나. 내 나이 칠십이다. 김정일이랑 동갑이다. 이젠 안 속는다."
현 MB정부에 대해 날선 비판을 쏟아내던 그도 총선결과에 대한 예측을 묻자 그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노무현을 얘기하면 "짠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화명동의 한 미용실에서 만난 20대 여성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의미를 묻자 의외로 반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노 대통령 그때 참 좋아했다. 소탈하고 서민적인 마인드를 좋아했다. 애만 쓰다 그렇게 가시다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함께 미용실에 있는 중년 여성은 "천세만세 누리려고 새누리당인가"라고 여당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또다른 미용실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은 "문화바우처 혜택만해도 노 대통령 때와는 달리 많이 깎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며 구체적으로 문화정책의 퇴보를 지적하기도 했다.
부산시민들의 마음에는 지역주의 돌파를 시도하다 결국 좌초하고만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현 정부 실정에 대한 반발심도 이같은 부채의식을 부추기는 듯했다.
사실상 '적지'(敵地)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잇따라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에게서도 이 같은 부채의식은 마찬가지였다.
낮 12시30분께 북구 덕천2동의 한 빌딩 2층에 마련된 민주통합당 문성근 예비후보의 선거캠프를 찾았다. 마침 자원봉사자들의 오프라인 모임이 마련돼 있었다. 문 후보의 오랜 동료인 배우 명계남씨가 조용히 손님들을 맞이했다.
근처 사상구에 선거캠프를 차린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더불어 '친노'의 대표격인 문 후보는 '왜 왔노'라는 말을 주민들로부터 많이 듣는다고 자원봉사자들 앞에서 털어놓았다.
지명도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로 예상되는 허태열 의원과 견줘 떨어질 게 없지만 부산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는 이유가 그의 발목을 항상 잡는 모양이었다.
"'왜 왔노', 이 말을 (주민들로부터)많이 듣는다. 문재인 이사장을 포함해서 부산에서 민주진영 활동하신 분들이 저 몰래 의논하고, (출마를)제안했다. 길게 고민 안 했다. 당대표 경선도 그렇고, 총선도 그렇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노무현 대통령 생각도 나고…(잠시 목이 매인듯 침묵하더니) (노 대통령을)마음 속 형님처럼 생각했다. 2002년 제 큰형 돌아가셨을 때 문상오셨다. 그때부터 형님처럼 생각했다. 재벌, 권력 가진 사람들이 휘두르는 세상은 더이상 안 된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이번 선거는 12월 대선승리의 디딤돌이다. 문재인 이사장은 대선후보 경선을 뛰어야할 분이다.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손학규든 누가 (민주당 후보가)되든 관심 없다. 누가 되든 총선 승리 후 축제 분위기 속에서 (대선후보를) 내면 되는 것이다."
문 후보는 "사람이 의리를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이곳은 20여년 동안 한나라당이 싹쓸이한 곳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출마한 곳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과의)의리 지키러 왔다. 인생 한번 사는 것인데, 화끈하게 살자고 결심해서 오게됐다"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의 못다 이룬 국회의원 당선의 꿈을 이루는 것을 그는 의리라고 말했다.
문 후보는 최근 자신을 비롯해 민주통합당 후보들에게 유리하게 나온 여론조사결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이번 선거는 민족사의 20~30년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다. 민족사의 대회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노 대통령이 4번 떨어지고, 김두관 지사가 5번인가 떨어지고, 김정길 장관이 7번 떨어졌다. 어떤 사람은 결국 죽기까지 했다. 2000년 총선에서 노무현은 여론조사에 10% 정도 이겼는데, 결국 졌다. 여론조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이창동 감독은 이날 문 후보를 격려하기 위해 캠프를 찾았다가 자원봉사자들에게 몇마디 건넸다. 그 역시 노무현을 말했다.
이 감독은 "지금까지 많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번에도 큰 빚을 지게 됐다. 정치하기 싫어했지만 제 생각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것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자기희생으로 '국민의 명령'을 시작했고, 정당정치인이 됐고, 총선 출마를 하게 됐다. 노무현을 위해 저는 못하고 있는 것을 잘 하고 있다. 많이 도와달라"고 말했다.
20여년간 민주당의 선거운동을 도운 이력을 밑천삼아 문 후보를 돕고 있다는 한 자원봉사자는 "이런 선거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먼저 (후보를)알아봐주고,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이 이제는 반감을 넘어 분노가 느껴진다"며 "분노는 분명하다. 그 마음을 민주통합당에 열어주실지, 우리 하기나름"이라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후보들은 이번 총선서 부산·경남에서 '바람이 다르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20여년 동안 보수정당의 텃밭이었던 이곳에서 진보정당의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의미다. 그 바람이 '노풍'(盧風)인 것은 간단한 사실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다가오는 총선의 결과는 어떤 식으로든지 노무현의 부활이냐, 퇴락이냐 둘 중 하나로 결정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