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87년 처음 등장해 약 25년간 두 번의 큰 부침을 겪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은덕(?)으로 폐지됐던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가 새 생명을 찾아가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생사여탈권을 쥔 정치권에서 출총제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재계 압박용 카드로 분석되지만 실은 재계가 이를 부추긴 꼴이다. 서민의 생명 줄인 골목상권까지 대기업들이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며 공분을 샀기 때문이다. 업종도 기업형슈퍼마켓(SSM),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은 물론 제과에서 치킨·분식·세탁업까지 참으로 다양하고 세세하다.
당연히 대기업들이 손을 뻗치니 중소기업과 영세업자들은 거리에 나앉게 됐다. 상위 100대 기업의 경제력 집중도 역시 2003년 42.5%에서 2010년 51.1%로 높아졌다. 수치로도 입증된 셈이다.
MB정권의 어수룩한 경제정책도 한 몫 했다. 인수위 시절부터 비즈니스 프랜들리(친기업 정책)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재벌 계열 건설사 사장 출신답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제일 먼저 찾았고 출총제도 제일 먼저 없앴다.
그 결과는 재벌들의 잇속 채우는데 효험을 발휘했다. 2009년 출총제가 폐지된 후 대기업 계열사가 크게 늘면서 중소기업과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됐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공정위가 발표한 대기업집단의 계열사 증가 수치를 보면 문어발을 넘어 지네발 수준이다. 상호출자·지급보증제한 55개 대기업집단의 소속회사 수가 지난해 4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될 당시 1554개에서 1629개로 증가했다.
그룹 계열사는 5월 1549개로 단 한 번 줄었을 뿐 이후에는 매달 2~20개 업체가 계열사에 포함돼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규제에 대한 정부의 방침을 무색하게 했다.
◇10대기업 계열사 4년 새 64%나 늘어
이를 자산순위 10대기업에 한정해 보면 2007년 383개에서 지난해 630개로 늘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무려 64%나 증가했다. 그룹별로 보면 삼성은 2007년 59개에서 80개로 21개사가 늘었다. 현대차도 36개에서 55개, SK는 64개에서 92개, LG는 33개에서 61개, 롯데는 44개에서 79개로 늘었다. 핵분열 수준의 영토 확장이다.
요즘 회자되는 말로 '1대99'라는 것이 있다. 사회양극화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다수가 고통 받는 사이 소수만이 배부른 상황을 빗댄 것이다. 통계치를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도 이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MB정부와 재벌의 밀월관계 4년 '합작품'이 대기업 영토 확장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현 정부가 출범 초기 친기업 정부를 표방해 놓고 갈수록 친 서민으로 돌아섰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재계의 인식은 자가당착이다.
이것이 지난해 말 민주통합당 출범 직후 재벌 개혁을 부르짖으며 출총제 부활에 사활을 걸게 한 원인이다. 한솥밥 먹던 한나라당까지 가세하며 이제는 기정사실화됐다.
29일 민주통합당이 또 다시 출총제 부활을 공식화 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나온 언급이라 재계의 긴장감도 여느 때보다 짙어졌다. 실효성이 없다며 물 타기를 해 보지만 정권 말기에 기세등등했던 예전과 달리 바짝 엎드린 채 눈칫밥이다.
민주통합당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는 이날 사회양극화와 경제불평등 완화를 위해 주요 재벌을 대상으로 출자총액제한제도(총출제) 부활 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지난 10년 상위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는 실질자산증가율은 물론 계열사 수에 있어서 확인됐다"며 "계열사 출자에 의한 지배력 확대와 문어발식 확장을 방지하기 위해 폐지되었던 출총제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경제력 집중 억제라는 본래 취지에 맞게 출총제 대상 기업을 자산규모에 상관없이 상위 10대 재벌에만 적용하기로 했다. 또 출자총액을 순자산의 40%까지만 인정하고 규제도입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동종업종 투자 등 불필요한 예외규정은 대폭 축소키로 했다.
재벌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에도 칼을 들이대기로 했다. 대기업의 이익을 재벌 2, 3세에게 거저 넘겨준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일감 몰아주기를 제한하기 위한 법 개정에도 나서기로 한 것이다.
◇눈칫밥 재계, 실효성 없다 '콧방귀'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경련은 정치권의 출총제 부활 논의에 콧방귀다. 대기업의 출자를 제한하면 대신 해외로 투자처를 옮겨 국내 경제가 나빠질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도 한다.
이승철 전경련 전무는 지난 20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출총제 등은 법제화할 수가 없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출총제를 한다는 것은 기업들의 해외 투자를 장려하는 것이다"며 "해외 투자엔 출총제 제한이 없지 않은가. 옛날 폐쇄경제시대도 아니고,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고 언급했다.
그는 "출총제를 부활하거나 법인세를 올리면 대기업이 해외 투자를 늘려 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며 "대기업에 비판적인 정책이 많이 나올 것이지만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아이디어 차원에서 각종 대책을 내세우는 것은 곤란하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재계의 우려와 달리 현재 거론되는 재벌 개혁안들이 그대로 실현될 경우 앞으로 대기업의 수난은 한동안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기업집단에게 특수관계법인과의 거래에 대한 개별적인 상세공시 및 설명을 의무화한 것은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를 막는 효과가 있다.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일감몰아주기로 피해를 입은 경쟁기업(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하게 해 견제장치까지 둘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암암리에 벌어진 대주주 일가 사이의 '비과세 재산 증여'가 불가능해 진다. 그동안 일감몰아주기는 세금 없이 부를 물려주는 수단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야당은 이를 근거로 상속세나 증여세법상 포괄주의를 적용해 대주주 일가에게 증여세(또는 상속세)를 부과하고 수혜자에게 신고의무를 지워 위반시 조세포탈범으로 처벌키로 했다. 재벌가의 재산 이전 '꼼수'를 발본색원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적합업종에 대한 대기업의 진입제한 위반 시 경영진 또는 지배주주에 대한 징역형 또는 벌금형을 부과할 방침이다.
하지만 LG·SK·GS 등 지주회사로 전환한 기업들이 출총제 적용서 제외되고 순자산 10조를 넘는 기업이 몇 곳 안 되기 때문에 제한적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를 보완해 매끄럽게 다듬는 것이 앞으로 정책과제다.
때문에 대기업들은 한동안 서릿장 같은 찬바람을 견뎌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현 정부의 실정과 대기업 친화 정책은 철저히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재벌에 칼을 대겠다는 정치권의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치권이 표를 의식해 대기업을 몰아붙이면 결국 대기업 전체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욕을 먹게 된다"며 "기업이 고쳐야 할 것은 고치겠지만, 급진적인 대기업 때리기는 투자와 고용창출을 막아 결국 경제회복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중소기업중앙회는 정치권의 출총제 논의에 반색하고 있다. 중기중앙회는 "출총제 폐지 후 대기업들이 중소기업 영역에 무차별적 침투하면서 비상장계열사 일감몰아주기 등 불공정 거래 관행이 횡행하고 있다"며 "대·중소기업이 공존하는 건강한 기업생태계가 대기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