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5-07-08 16:37 (화)
"한글날 공휴일됐는데…" 엇박자내는 법원 판결문
상태바
"한글날 공휴일됐는데…" 엇박자내는 법원 판결문
  • 김지원 기자
  • 승인 2013.10.09 14: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반 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법원이 판결문 공개 확대를 방침으로 세웠지만 올바른 우리말 사용을 막는 어려운 한자어와 일본식 표현이 넘쳐 취지가 무색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1월부터 확정된 형사 판결문을 공개하고 2015년부터는 민사 확정 판결문도 공개하기로 했다. 판결문과 증거목록 등의 열람·등사가 가능해진 데 따른 조치이자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대법원 산하 법원도서관은 법관과 법원 직원들이 업무에 참고할 수 있는 각종 어문 자료를 수록한 '법원 맞춤법 자료집' 전면 개정판을 발간해 올해 초 배포했다. 2006년 법원 맞춤법 개정 이래 7년 만이다.

또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7월 판결문 적정화 방안을 발표하고, 9월부터 모든 형사 재판부에서 시행키로 했다.

그러나 어려운 한자어 또는 일본식 어투의 표현, 명확한 의미 전달을 방해하는 긴 문장 등이 여전히 자주 등장해 '외계어'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어려운 한자어·일본식 어투·난해한 문장 넘쳐나

실제 판결문을 보면 금원과 주취, 교부, 불상의, 상당(相當)하다, 편취하다 등 일상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어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들 단어는 모두 대법원 용례집에도 나와 있지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순서대로 보자면 돈과 술 취하다, 내어 줌. 알 수 없는, 알맞다, 속여 뺐다로 순화해야 한다.

불필요한 일본식 번역투도 개선해야 할 대상이다.

예를 들어 '형법 ~이 정한 소정 또는 제반 양형의 요소를 참작하여…'라는 문장 가운데 소정·제반은 여러(가지)'라는 우리말로 바뀌어야 옳다.

단골로 눈에 띄는 '∼함에 있어', '∼에 의하여', '∼에 있어서'도 일본식 어투인 만큼 '∼하면서', '∼에 따라', '∼에서'로 표현해야 간결하다.

'사유가 된다고 할 것이다', '효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등은 일본어 '노데아루(のである)'(∼할 것이다)에서 유래한 번역투 표현이다.

한두 가지 용어와 어투뿐만 아니라 문장 자체가 길고 의미가 모호한 것도 있다.

민사소송과 관련된 한 판결문을 보자.

"채권양도의 대항요건이 이미 갖추어진 경우에는 채무자가 양도인에 대하여 변제를 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유효한 변제라 볼 수 없고 이로 인하여 양수인에게 귀속하였던 채권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어서 양수인으로서는 여전히 채무자를 상대로 채권을 추심할 수 있으므로 양도인이 채무자로부터 수령한 금전에 대하여 양도인과 양수인 사이에서 양수인의 소유에 속한다거나 양도인이 이를 양수인을 위하여 보관하는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없다".

한 문장이 250자에 육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앞뒤 사정을 모르고서는 문장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형사소송 판결문에서는 "피의자의 행위는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사회 관념상 허용될 수 있는 상당성 있는 행위라고 볼 수 없다"라는 문장이 단골이다.

◇길고 어려워야 판결문?…관행 혹은 권위주의

판결문을 쉽게 쓰자는 법원 내 움직임은 때마다 등장했으나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았다. 공감대가 부족하고 권고 사항이어서 사실상 강제성이 없는 탓이다. 또 법관들이 권위주의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법률의 주요 개념이 일본에서 정립된 학술 용어가 그대로 들어온 것이 많다. 한자어와 일본식 어투가 많은데 판사들은 도제식 교육을 받기 때문에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다"며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사용했던 탓인지 쉽게 버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법원 내부에서도 개인이나 모임 차원에서 순화운동을 펼치는 등 개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로 이끌만한 동력은 부족한 상황이다"고 전했다.

아울러 "일부에선 짧고 쉽게 쓰는 것보다 지금처럼 다소 어렵고 길게 쓰는 것이 권위 있다고 보는 판사도 있다"고 언급했다.

서울남부지법 한 판사는 "판결문은 당사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만큼 일반 국민들도 이해할만한 수준으로 쉽게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