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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평대 아파트 살다가 길거리에 나 앉게된 할머니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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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평대 아파트 살다가 길거리에 나 앉게된 할머니의 사연
  • 엄정애 기자
  • 승인 2013.08.15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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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이북에서 넘어와 기차에서 빵을 팔아 돈을 벌었다.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고생하며 '지독하게 모아' 남기고 예순다섯되는 어느해 북망산 길을 떠났다.

김옥순(73·가명) 할머니는 서울 광진구 뚝섬 옆 아파트에 전세로 살았다. 전셋돈 2억5000만원은 할아버지가 남긴 것이었다. 원래는 마장동 아파트에 살았지만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성형외과 의사와 결혼한 딸네 집 근처로 이사했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열린 생식설명회 자리에 갔다가 최명희(60·가명)라는 여성을 알게 됐다. 마사지숍에서 일한다는 최씨는 허리가 아픈 할머니에게 종종 마사지를 해줬다.

할머니는 그런 최씨가 고마웠다. 의사 사위를 두고 왠지 척지는 결혼을 한 것 같아 딸을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던 터라 외로웠던 할머니는 최씨가 두고두고 고마웠다.

지난 3월 최씨가 "월세 비용이 모자라 현재 살고 있는 방에서 나가야 한다"고 고민을 털어놓자 할머니는 "우리 집에 방이 한 칸 남으니 들어와서 살아라"고 제안했다. 어차피 할머니 혼자 살기에 30평대 아파트는 너무 휑했다. 이렇게 3월부터 최씨는 할머니와 함께 뚝섬 아파트에서 살았다.

최씨의 친구라는 권경구(44·가명)씨가 할머니의 집을 들락날락했다. 붙임성 있던 권씨는 할머니를 이모님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고 한다.

사기행각이 시작된 것은 한 달이 지난 4월부터였다. 권씨는 할머니에게 홍제동에 보증금이 싼 아파트가 있으니 현재 2억5000만원 전세집을 빼서 옮기는 게 어떠냐고 유혹했다.

권씨는 홍제동에 5000만원짜리 집 두 채를 계약한 뒤 한 채는 할머니 본인이 살고, 다른 한 채는 한 달에 50만원 정도 월세를 주며 용돈을 버는 게 어떠냐고 꼬드겼다.

할머니는 이 말을 믿고 1억원을 내줬다. 이후 권 씨는 할머니에게 필리핀 여행을 시켜주면서 환심을 샀다. 남은 재산까지 뜯어내기 위한 계산이었다.

권씨의 제안은 다시 이어졌다. 할머니가 "남은 재산 1억2000만원 정도로 원룸을 사서 임대를 주고 싶다"고 언급하자, 이때를 놓치지 않고 권씨가 나섰다. 권씨는 "남은 재산을 주면 매달 돈을 불려주겠다. 언제든지 돌려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권씨를 철석같이 믿었다. 같이 살던 최씨를 믿고 있던 터라 친구인 권씨도 믿을만 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1억2000만원을 권씨에게 내줬다.

뚝섬 전세집을 비워줘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자 권씨는 홍제동 집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사정이 생겼다며 한 달 정도만 늦게 입주를 하면 어떻겠냐고 둘러댔다.

그리고 할머니를 자신이 마련했다는 성내동 집에 이사시켰다. 이날이 5월16일이었다. 그 후에 권씨는 필리핀 여행을 다시 시켜주며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여행을 다녀온 할머니가 필리핀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말하자 권씨는 1000만원을 주면 필리핀에 터전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1000만원이 또 권씨에게 넘어갔다..

이 때 할머니에게 남은 재산은 1500만원 뿐이었다. 권씨는 이마저도 뜯어낼 생각이었다.

권씨는 "급전이 필요하니 돈을 빌려주면 빠른 시일 내에 이자 30만원을 붙여서 돌려주겠다"고 했고, 할머니는 또 이 말을 믿고 남은 1500만원을 모두 내줬다.

7월 중순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권씨의 권유로 임시로 살고 있던 성내동 집에 집주인이 방세를 달라며 찾아온 것이다. 월세가 자그마치 117만원이었다.

이제야 할머니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권씨가 계약했다는 홍제동 집에 찾아가봤다. 권씨가 계약을 했다는 두 채 중 한 집에 살고 있던 사람이 사기라고 말해줬다. 하늘이 노래졌다. 목이 메었다.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할머니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의 전 재산은 이미 권씨의 손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권씨가 시켜준 두 번의 필리핀 여행도 모두 할머니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었다. 홍제동 집은 애초에 계약한 적도 없었다.

권씨는 현재 다른 사기 건으로 수서경찰서에 붙잡혀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권씨는 법의 심판을 받겠지만 할머니가 날린 돈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할머니의 사기 건을 맡은 성동경찰서는 아직 수사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할머니는 가지고 있던 재산 중 김치냉장고 등 가재도구를 팔아 생활비를 일부 마련하고, 교회와 아는 사람의 집을 전전하고 있다.

할머니는 당장 살 집이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언제까지 지인들의 집에 얹혀살 수는 없는 일이다. 성형외과 사위와 딸이 있지만 할머니는 "죽어도 신세지기는 싫다"고 했다.

딸과 사위도 사정이 안 좋아서 살 집을 마련해줄 능력은 안 될 거라는 게 할머니의 말이었지만, 더 큰 이유는 애초부터 너무 기운다는 핀잔을 들으며 결혼한 딸에게 미안해서다. 딸은 시댁에서 예단 따위로 구박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직도 사위가 불편했다.

이야기를 마친 할머니는 지인의 소개로 살 곳을 마련한다며 바쁜 걸음을 옮겼다.

"집이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살 데가 없는 게 제일 괴로워. 허리가 아파서 일도 못하는데 언제까지 남의 눈치 보면서 살 수 없어서……" 할머니가 남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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