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잊혀지는 것' '사랑의 썰물' '거리에서' '그날들' '널 사랑하겠어'….
감수성 짙은 곡들을 작사·작곡하며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청춘의 자화상을 그린 그룹 '동물원' 출신 싱어송라이터가 김창기(50)다.
2000년 솔로 1집 '하강의 미학' 이후 13년 만에 발표한 솔로 2집 '내 머리 속의 가시'는 어느덧 50대로 접어든 자신과 같은 40, 50대의 초상을 스케치했다. 인터넷 블로그에 풀어낸 자신의 음악인생과 내면 등의 고뇌를 지난해 9월부터 노래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든 100곡 중 10곡을 가려내 이번 앨범에 담았다.
음반이 주목한 모티브는 '대상에 대한 상실'이다. 막연한 그리움에 머물러 있는 것 만은 아니다. 앨범 10곡의 배치는 상실에서 회복해 나오는 과정이다. "상실, 부정, 분노, 거래, 우울, 수긍"의 순으로.
상실의 대상이 된 곡은 1998년 '동물원' 1집 '거리에서'를 함께한 팀 동료이자 절친한 가수 김광석(1964~1996)에 관란 노래인 타이틀곡 '광석이에게'다. "너의 노래와 나의 언어로 서로의 자신을 찾고/ 외로움으로 뭉친 가슴의 이 덩어리를 사랑이라 믿고/ 단골집 이모가 제발 싸움은 밖에 나가 하라고 하기에/ 우린 밖으로 뛰쳐나가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고함쳤지."
김창기 특유의 '사진 컷' 같은 노랫말은 김광석에 대한 추억을 한 바가지 더 길어내며 애절함을 더한다. "평소 광석이에 대한 생각은 잘 안하려고 해요. 복잡해서요."
애초 타이틀곡도 아니었다. 그런데 앨범 발매가 미뤄지면서 "정면 돌파하자"는 판단이 섰다. "김광석 노래를 엮은 뮤지컬 '그날들'의 시류에 편승한다고, 친구를 팔아먹는다는 소리를 들을까 두렵기도했"지만 결국은 이것이 답이었다.
"광석이에게 대해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죠. 가장 먼저 든 것은 죄책감, 그 다음에는 미움이더라고요. 죄책감은 형제 같은 친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 미운 것은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것…."
'광석이에게'에서 이어지는 '눈사람'은 실연 이야기다. 말하는 듯한 창법이 묻어나는 동시에 감정의 고조도 느껴진다. "사람에 대한 상실감은 크게 두 가지죠. 첫번째는 가족이나 친구, 두 번째가 여자죠. '광석이에게'가 친구에 대한 상실감을 노래했다면 '눈사람'은 여자입니다. 자신이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느껴지고 그것을 수긍하고 자책만 하는 사람의 노래지요."
'난 그냥 이대로 있겠어!' '난 살아있어' '살아가게 되는 걸' '내 머릿속의 게임'은 상실한 무엇인가에 대한 부정과 분노로 카테고리화할 수 있는 노래들이다. "난 머리가 좋아/ 늘 내 자신을 속여/ 난 머리가 나빠/ 늘 내 자신에 속아" 등 긍정과 부정이 반복되는 모순의 리듬이 인상적인 '내 머릿속의 게임'은 마치 이번 앨범을 함축한 곡과도 같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곡은 가장 서정적인 '원해'다. 타이틀곡으로 점찍었던 곡이다. "영(young)한 멜로디의 곡이에요. 요즘 친구들도 좋아할 수 있는 멜로디를 풀어내고 싶었어요."
"아이들은 숙제를 하고/ 아내는 드라마를 보고/ 난 책장을 넘기며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걷는 상상을 해" f등의 노랫말로 이뤄진 '난 아직도 외로워'는 가장 자전적이다. '난 아직도 외로워'의 반복은 우울을 상징한다.
마지막곡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 해'는 그래도 넌지시 희망을 던진다. 아들(17)과 딸(11)이 코러스로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마지막곡은 제 삶의 모토이기도 해요. 딴 것 생각하지 말고 지킬 것은 잘 지키자는 것이죠"라며 웃었다.
다정한 아빠이자 자상한 남편, 서울 도곡동의 소아정신과 '생각과 마음 의원' 원장으로 안정적이면서도 바쁘게 생활하던 그가 다시 작곡을 하게 된 것은 "왜 노래를 만들지 않느냐"는 딸의 느닷없는 질문 때문이다.
"딸 아이가 제가 만든 곡 중 제일 좋아하는 것이 '널 사랑하겠어'예요. '씨스타' 효린이 불렀다고요. 하하하." 결국, 김창기가 원한 것은 '소녀시대'와 '씨스타'를 좋아하는 딸뿐 아니라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공감의 정서"다.
"(정신과의사 이범룡과 결성한 듀오) '창고' 때와 1집 때는 대중을 의식하기보다는 제 것만 했어요. 대중이 좋아할 것, 원할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대중과 같은 주파수를 탈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재와 접점을 만들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날 선 감각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을 법하다. 최근 19집 '헬로' 수록곡 10곡 중 자작곡을 1곡 만 실은 조용필(63) 역시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의 1위부터 100위까지 곡을 모두 들어봤는데, 최근 들어 나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김창기는 "조용필 선배님이 헤비급이라면 저는 플라이급"이라면서도 "선배님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대중에게 접근하는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란 쉽지가 않아요. 특히 저 같은 사람은 노래를 못하는 싱어송라이터라, 노래로 승부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난해 9월부터 공부하듯이 피 튀기게 하루에 1곡씩을 써나갔죠."
김창기의 보컬은 기술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포크 가수들에게 느껴지는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듯이 내지르는 창법은 호소력이 크다. "예전과 달리 감정의 고조를 드라마틱하게 싣고자 했다"는 말마따나 변화의 조짐도 느껴진다.
하지만 김봉현 음악평론가가 "전형적인 소심한 남자이면서도 찌질하기보다는 특유의 소년 같은 해맑음과 순수함이 느껴진다"고 짚었듯, 김창기의 목소리에는 서정적인 것이 여전히 배어있다. 이런 목소리에 대해 김창기는 "향수를 자극하지만 자칫하면 그 시대에만 머무를 수 있죠. 양날의 검이에요"라고 자평했다.
이번 앨범에서 자기 복제를 철저히 경계한 이유다. "안 그러면 7080에 머무는 것이죠. 지금은 2013년이잖아요. 과거를 현재에 팔아먹는 것은 싫었어요."
김광석이 이 음반을 들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내게 주지, 왜 네가 불렀냐."
김봉현 음악평론가는 "동물원의 대부분 명곡이 김창기라는 싱어송라이터에서 나왔다"면서 "이번 앨범 역시 완성도가 뛰어나다. 최근 불고 있는 '조용필 신드롬'이 아이돌 음악에 대한 반작용, 존경할 수 있는 가수의 재조명이라는 범주 안에 있는데 김창기 역시 그 안에 포함될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