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들이 자체 인공지능(AI) 칩(Chip) 개발에 속도를 높이면서 ‘반도체 굴기(崛起 │ 우뚝 솟음)’를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판 엔비디아’로 불리는 그래픽처리장치(GPU) 개발업체 ‘무어스레드(중국명 무얼셴청 │ 摩爾線程)’는 지난 12월 20일 ‘화산’과 ‘루산’이라는 차세대 칩을 공개했는데, ‘엔비디아(NVIDIA)’의 최신 칩인 ‘블랙 웰(Black well)’의 성능에 근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러다 한국에 유일하게 남은 초격차 산업인 반도체마저 중국에 따라잡히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최근 ‘무어스레드’, ‘메타X(MetaX)’, ‘비렌 테크놀로지(Biren Technology │ 壁仞科技)’ 등 중국 AI 반도체 업체들은 잇달아 기업공개(IPO │ Initial Public Offering)에 뛰어들며 첨단기술 개발을 위한 자금 확보에 나섰다. 중국 정부도 반도체 생태계 육성을 위해 최대 5,000억 위안(약 104조 원) 규모의 정책자금 지원을 선언했다. ‘블룸버그(Bloomberg)통신’은 지난 12월 13일(현지 시각)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당국이 2,000억 위안(약 42조 원)에서 5,000억 위안(약 104조 원)에 이르는 보조금 및 금융 지원 패키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내년 또는 2027년에 AI 반도체 시장에 ‘딥시크 모먼트(Deep seek moment │ 중국이 저비용의 생성형 AI 딥시크를 출시해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가 와도 놀랍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는 엔비디아와 그 공급망에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전했다.
시장은 이번 조치에서 중국이 반도체를 단기 경기 부양 수단이 아닌 중장기 국가 전략 산업으로 명확히 위치시킨 점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미국이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인 H200의 중국 수출을 승인한 가운데, 중국이 해외 첨단 칩을 합법적으로 확보하는 것 외에 자국산 반도체 개발을 병행하는 ‘투 트랙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자금 지원 규모가 최대로 실현될 경우 역대 최대의 국가 주도 반도체 지원 프로그램이 된다. 특히 3,440억 위안(약 72조 원) 규모로 책정된 ‘3기 빅펀드(국가 집적회로산업 투자 기금)’ 등 기존 정부 투자 계획과 별도로 운영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그간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반도체 기술 자립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민간에서도 첨단 칩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앞서 화웨이(Huawei)는 인공지능(AI) 서버 시스템 ‘클라우드 매트릭스(Cloud Matrix) 384’를 내놓고 엔비디아에 도전하고 있으며 바이두(BIDU)와 알리바바(Alibaba) 역시 자체 개발 칩 다량을 하나로 묶는 대규모 컴퓨팅 클러스터를 통해 칩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렇듯 중국의 매서운 추격에 한국 반도체의 현실은 위태롭기만 하다. 공학 기술 석학들과 산업계 전문가들의 모임인 한국공학한림원은 국내 AI 반도체산업에 대해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국공학한림원 반도체특별위원회는 지난 12월 17일 ‘2025 반도체특위 포럼’을 열고 AI 반도체 강국 도약을 위한 과제를 담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빼면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범용 D램 시장에서도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가 1년 안팎까지 줄어들고 있어 바로 턱밑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반도체산업 전반의 초격차 경쟁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
이와 함께 반도체에만 기대 외줄 타기를 매달리고 있는 한국의 산업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도 필요해 보인다. 올해 한국 수출이 처음으로 연 7,000억 달러 돌파를 눈앞에 둘 정도로 호조를 보였지만, 반도체를 뺀 1∼11월 수출액은 오히려 지난해보다 줄었다. 지난 12월 22일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이달 20일까지 누적 수출액은 6,831억 4,600만 달러로 나타났다. 역대 최대였던 지난해 연간 수출액 6,838억 달러와는 약 7억 달러 가까이 차이가 난다. 다만 반도체를 제외한 주요 품목의 수출이 부진한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올해 1∼11월 누적 기준 반도체 제외 수출액은 4,876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오히려 1.5% 줄었다. 반도체 경기가 후퇴하거나 경쟁력이 흔들리면 전체 산업 기반이 무너지는 위태로운 구조다.
지난 12월 23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5대 주력 품목 한·중·일 수출경쟁력 비교’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반도체, 자동차, 기계, 철강·비철금속, 화학공업 등 5대 제조업 분야를 대상으로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과 물량을 기준으로 한 양적 경쟁력, 그리고 글로벌 비교우위 및 부가가치를 반영한 질적 경쟁력을 종합해 3국의 수출경쟁력을 분석했는데, 한국무역협회는 중국이 반도체, 자동차, 기계, 철강·비철금속, 화학공업 등 5대 주력 제조업 가운데 반도체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을 추월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와 함께 한국을 이끌 미래 신산업을 발굴에 국가역량을 집주(集注)하고 경쟁력을 잃은 제조업 분야는 고부가가치 전환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정부는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해 2026년부터 5년간 총 150조 원을 첨단전략산업 및 관련 생태계에 수혈하겠다고 했다. 글로벌 금리 변동성, 민간 투자 위축, 기술 패권 경쟁이 동시에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정책금융과 민간 자본을 결합해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는 침체된 투자 환경 속에서 국가가 다시 성장의 마중물 역할을 자임했다는 점에서 선명한 의미를 지닌다. 석유화학 등의 구조조정도 이미 첫 단추를 끼운 상태에 있다. 핵심 관건은 앞으로의 추진 속도에 달려 있다. 전 세계가 첨단산업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전력 질주를 하는 상황에서 느린 혁신은 혁신이라고 부르기엔 낯 뜨거울 수밖에 없다. 중국의 수출경쟁력 강화는 특정 산업의 단기적 성과가 아니라 제조업 전반에 걸친 구조적 변화로 보고 대응해야만 한다. 따라서 한국은 물량 경쟁보다 기술력과 부가가치 중심으로 산업정책의 추진 방향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고 무게중심을 옮겨야만 한다. 반도체와 같은 우위 산업에서는 격차를 더 넓히고 경쟁이 심화하는 분야는 시장별·품목별로 세분화·차별화 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