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주력산업이자 ‘산업의 쌀’인 철강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미국발(發) 관세 충격에 이어 유럽연합(EU)도 수입산(輸入産) 철강에 대한 관세장벽을 대폭 높이면서 미국발(發) ‘관세 도미노(Domino)’가 현실이 됐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10월 7일 수입 철강 제품에 대한 무관세 쿼터 총량을 지난해의 약 절반으로 줄이고 쿼터 초과분에 부과하는 관세율을 25%에서 미국과 같은 수준인 50%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무관세를 적용하는 철강 수입량(쿼터 │ Quota)도 절반으로 축소하겠다고 한다. 그동안 EU는 국가별 일정 쿼터에 무관세를 적용하고 이를 넘어선 물량에 한정하여 25%의 관세를 부과해 왔는데, 앞으로 이 쿼터를 절반으로 줄이고 관세도 두 배로 올리겠다는 것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미국의 고율 관세에 맞서 유럽 내 철강 산업을 보호하려는 조치라지만 미국과 EU의 고율 관세 파고에 우리 철강 업계가 졸지에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 10월 7일(현지 시각) ‘유럽 철강 업계 보호 대책’ 초안을 발표하고, 무관세 수입 철강 할당량(쿼터)을 연간 3,453만t(작년 기준)에서 1,830만t으로 47% 축소하고, 쿼터 외 수입 관세율을 기존 25%에서 50%로 올리는 저율관세할당(TRQ) 제도 도입 계획을 밝혔는데 미국이 철강·알루미늄에 50% 고율 관세를 부과한 뒤 유럽으로 덤핑 물량이 쏟아지게 되자 EU도 자국 산업 보호를 이유로 철강 고율 관세를 공식화한 것이다. 국가별 쿼터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무관세 총량이 반 토막 나는 만큼 한국 등 주요 수출국의 쿼터도 대폭 삭감될 전망이다. EU는 미국과 함께 국내 철강업계의 양대 수출 시장으로, 단일 시장으로는 최대 규모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對) EU 철강 수출액은 44억 8,000만 달러(약 6조 3,000억 원)로 미국(43억 5,000만 달러)보다 많았다. 하지만 이번 관세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며 EU 시장으로의 수출 감소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국은 지난해 EU에 철강을 총 393만t 수출하며, 튀르키예(1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출 물량을 기록했다. 이번 초안은 내년 6월 말 종료 예정인 현행 철강 세이프가드 조치의 연장·개편 성격으로, 회원국 투표를 거쳐 적용될 전망이다.
이렇듯 앞으로 개별 쿼터 협상을 벌여야 하지만 미국에 이어 한국의 최대 철강 수출 시장인 EU까지 수입 관문을 좁히면서 한국 철강 수출이 입을 타격은 불가피해 보인다. 여기에 미국 관세전쟁의 핵심 타깃(Target) 국인 중국은 지난 10월 9일 희토류 관련 기술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를 더욱 확대하며 ‘자원 무기화’의 고삐를 한층 강하게 조이고 있다. 중국은 사마륨, 스칸듐 등 7개 희소 금속과 이들로 만든 합금·산화물을 수출 통제 품목으로 지정하고 수출을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허가증을 받도록 한 내용이다. 더 놀라운 점은 중국산 희토류를 함유한 해외 가공품까지 수출 통제 대상에 포함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글로벌 희토류 공급망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렇듯 대외 환경이 급변하면서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한미 관세 협상 장기화로 고율 관세의 직격타를 맞으면서 미국 수입 시장에서 올해 초 7위였던 한국의 입지는 어느새 10위까지 밀려났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제약·바이오 등 전략 산업 전반으로 관세전쟁의 전선을 넓힐 태세다. 내년 전망은 더 암울하다. 세계무역기구(WTO)는 글로벌 무역 성장률이 올해 2.4%에서 내년에 0.5%로 둔화할 것으로 봤다. 뉴욕타임스(NYT)와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WTO는 지난 10월 7일(현지 시간) ‘세계 무역 전망 및 통계’ 보고서를 통해 내년 세계 글로벌 상품 무역 성장률 전망치를 0.5%로 발표했다. 이는 올 8월에 내놓은 성장률 전망치인 1.8%보다 크게 낮아진 수치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전쟁’ 여파로 글로벌 무역이 대폭 둔화할 가능성을 반영한 것이다. 앞서 미국이 지난 3월 수입 철강 제품에 대해 기존의 무관세 수입 쿼터(한국은 연 263만t)를 폐지하고 품목 관세를 25%에서 50%까지 높였다. 한국의 철강 수출은 지난 5월 전년 동월 대비 12.4% 감소한 데 이어 6월 -8.2%, 7월 -3.0%, 8월 -15.4% 등의 감소율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함께 국산 철강 수출의 양대 시장의 한 축인 EU까지도 막히게 되면 수출은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철강 기업들을 위협하는 중국산 저가 공세와 국내 건설경기 침체는 해소될 기미가 없다. 이에 더해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과 탄소 배출 규제 강화처럼 업계의 부담을 키우는 악재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 장기 침체를 넘어 생존을 위협받을 처지라는 기업들의 호소가 괜한 엄살이 아니다. 미국의 고관세로 타격을 입고 있는 국내 철강업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런데도 우리의 대응은 안일하다. 철강 산업 지원을 위해 발의된 이른바‘K-스틸법’은 여야의 정쟁 속에 갇혀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이렇듯 위기를 맞은 철강 산업을 지원하겠다며 여야 의원 106명이 공동 발의한 ‘K-스틸법’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여야가 이례적으로 공감대를 이뤄 민생경제협의체에서 우선 처리하겠다고 공언했던 법안이었다.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철강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5년 단위의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각종 보조금·세제 지원과 규제혁신 등의 근거를 담았다. 하지만 여야의 대립 속에 민생협의체는 출범 선언만 한 채 가동되지 못하고 있고,‘K-스틸법’ 처리 역시 공회전만 하고 있다.
미국이 철강·알루미늄에 50% 고율 관세를 물린 후 유럽으로 덤핑 물량이 몰리자, EU도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장벽을 높인 것이다. 중국의 저가 공세와 내수 악화, 미국의 관세 폭탄에 시달려 온 국내 철강업계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져드는 형국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관세 폭탄 충격이 유독 한국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미국 수입시장 점유율에서 올 1∼7월 한국은 10위(3.7%)로 지난해 7위(4.0%)에서 세 계단이나 밀려났다. 교착 상태에 빠진 한·미 관세 협상 탓에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고율 관세를 부담하고 있지만, 협상이 타결된 일본과 유럽은 15%대로 낮아졌다. 글로벌 경쟁에서 우리 기업이 불리한 처지에 몰리는 상황을 마냥 방치(放置)하고 방기(放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부는 감내할 수 있고 합리적인 수준에서 접점을 찾아 관세 협상을 조속히 타결하는 데 총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미 관세협상이 ‘버티기 늪’에 빠지며 교착상태가 장기화하는 모양새가 이어지자, 정부는 협상 돌파구 마련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지만 EU의 철강 수입 장벽 대폭 인상 예고,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강화 등에 따른 미·중 통상 갈등 등이 연거푸 발생하며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급기야 대통령실은 추석 연휴 내내 미국과의 관세 협상 해법을 찾는 데 공력을 쏟았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9일 브리핑에서 “5일, 7일, 8일 계속 추가 회의를 갖고 통상과 관세 협상 관련 회의를 했다.”라며 “연휴 기간 관세 및 통상 관련 회의가 지속 진행해 왔다.”라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지난 10월 9일 오후에도 ‘3 실장(강훈식 비서실장, 김용범 정책실장,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통상 회의를 열었다. 강 대변인은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지난 10월 4일(현지 시각) ‘하워드 러트닉(Howard Lutnick)’ 미국 상무장관을 만나러 미국에 다녀왔는데, 대미(對美) 금융 패키지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양측이 이야기한 바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이에 대통령실과 관계부처가 만나 같이 회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관세·비관세 수단을 동원하는 보호무역주의는 이제 글로벌 통상 질서의 일상처럼 ‘뉴노멀(New Normal │ 새로운 표준)’이 돼 버린 지금 새롭게 달라진 무역 질서에서 살아남고, 글로벌시장을 견인하려면 낡은 구각(舊殼)에서 과감히 벗어나 수출과 성장 전략을 전면 재설계해야만 한다. 상품 제조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서비스 분야로 수출의 지평을 확장하고, 남의 기술을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에서 과감히 벗어나 누구도 넘보지 못할 초격차 기술 개발과 시장 품목 다변화, 공급망 개척에 국가 진운의 명운을 걸고 앞서 나아가는 ‘패스트 무버(Fast mover)’ 전략이 추진되어야 할 때다. 갈수록 견고해 가는 보호무역 장벽을 뚫으려면 과감한 규제 철폐와 신 산업 정책으로 기업 혁신을 뒷받침하고 미국·EU 등 주요 교역국에 고(高) 전략 협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생사의 기로(岐路)에 선 기업들의 수출길을 터줘야 할 정부와 국회의 책임이 막중함을 각별 유념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