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무역의 종언(終焉)을 고한 한국과 미국의 관세 협상이 우여곡절 끝에 극적인 타결을 일궈냈다. 미국의 관세유예 종료 시한(8월 1일)을 하루 앞둔 지난 7월 31일(미국시각 7월 30일) 미국은 한국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를 당초에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은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87조 원) 투자, 1,000억 달러 LNG 구매 등의 무역 합의를 끌어낸 셈이다. 아울러 2주 이내에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통해 구체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
일단 15%는 대미(對美) 수출의 주요 경쟁 상대인 일본, 유럽연합(EU)과 같은 수준이어서 최악의 상황을 피했고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급한 불을 끄며 ‘큰 고비’를 넘겼다고 긍정 평가를 할 수 있다. 게다가 사회 갈등의 기폭제가 될 수 있는 쌀·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의 추가 개방을 막아내고, 안보위협이 될 수 있는 미국 ‘빅테크(Big tech)’의 초정밀지도 반출 요구를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한편 ‘마스가(MASGA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문구가 적힌 빨간 모자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한미 협상이 성공적인 딜(Deal)을 도출해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평가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란 또 다른 전쟁의 서막(序幕)이 올랐음을 의미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그동안 우리는 미국에 거의 무관세로 수출해왔지만 앞으로는 15% 관세를 물어야만 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로서는 재편된 새 통상 질서에서 우리 수출 기업들은 가격 우위를 잃고 경쟁국들과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됐다. 그동안 수십 년간 우리 기업들은 ‘적시(適時) 생산’과 ‘최저 가격’이라는 기준 아래 전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공장처럼 활용해 왔다. 이번 관세 타결은 앞으로 물건을 팔고 싶다면 그 나라에 가서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에겐 너무나 큰 도전이다. 국내 일자리부터 위험해질 수 있다.
미국은 7월 31일까지의 무역 협상 결과를 반영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새 상호관세 행정명령을 8월 7일 0시 1분부터 발효한다고 밝혔다. 한국은 협상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진 관세율 15%를 사수하며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사실상 무효화 되면서 13년간 관세 없이 미국에 수출해온 우리 기업들은 새로운 경쟁 환경에서 큰 부담을 안게 됐다. 대미(對美) 수출의 핵심인 자동차 산업은 2.5% 관세가 부과됐던 일본, 유럽연합(EU) 자동차와의 경쟁에서 가격 우위를 누려왔지만, 이제부터는 15% 관세율의 동일한 적용으로 가격 경쟁력의 상대적 약화가 불가피해졌다.
미국 시장을 둘러싸고 일본·독일 등 경쟁국과의 경쟁 격화도 자연스레 우려된다. 철강·알루미늄 분야는 6월부터 부과된 50% 품목 관세가 그대로 유지돼 수출 경쟁력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특히 일본이 미국 철강사인 US스틸을 인수해 현지 생산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우리 철강 업계의 충격은 크다. 이달 중 품목관세 부과가 예고된 반도체의 경우 미국이 한국에 대해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지만 「무역확장법」제232조에 따른 조사가 진행 중이어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자유무역 체제의 종언에 따른 교역 위축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도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다.
지금은 ‘관세 협상’ 타결의 긍정적 부분만 바라보며 마음 놓을 수만은 없는 엄중한 비상상황이다. 그러기엔 우리 시장이 감당할 파장이 결단코 가볍지만은 않아서다. 당연히 미국의 상호관세 15% 발효로 우리 기업들의 수출 여건 악화는 불가피해졌다. 가격 우위를 잃은 우리 기업들이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글로벌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기술 경쟁력을 키우는 데 주력해야만 한다. 초격차 기술 개발과 고급 인재 양성을 위해 기업은 과감한 투자와 혁신 노력을 기울이고 정부는 규제 혁파와 세제·재정 등 전방위 지원으로 기업을 뒷받침해야만 한다. 그래야 보호무역주의 장벽을 뚫고 우리 전략산업의 수출 엔진을 가동할 수 있다. 지난 7월 31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정부 부처 장·차관 워크숍을 주재하며 “이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겠다!”라고 한 말처럼 탄탄한 실력을 갖춰야만 강대국의 ‘자국 우선주의’에 휘둘리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대기업 중심의 대미(對美) 투자는 국내 신규 설비 및 연구 개발 비용뿐 아니라 연쇄적으로 중소 협력사 투자에도 영향을 끼친다. 관세율 15%로 가격 경쟁력 부담이 늘어나는 자동차 기업들은 국내 투자 위축 정도가 가장 클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선제대응에 나서고 있다. 일찌감치 현대차그룹은 북미 현지 조립라인 비중 확대 검토에 나섰다. 협력업체들은 매출 감소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 미국 생산기지 확대가 가속화될 2차전지 분야도 마찬가지 고민이다. 지난 8월 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 협력 펀드 구체화와 양국 간 실질적 협력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조선 빅3’와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는 최근 한미 조선 협력 관련 TF를 가동하고 나섰다.
우리 정부가 약속한 3,500억 달러 규모 대미(對美) 투자가 본궤도에 오르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국내 투자를 늘리기란 쉽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이는 국내 일자리를 줄이고, 국내 투자 여력을 축소하는 효과로 돌아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국내 산업 생태계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가 이제 국가 차원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당연히 국내 투자 위축은 고용감소, 나아가 내수부진 악순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국내 공장이 이전하고, 이에 따른 인력 감축이 이뤄지면서 인구소멸이 빨라지는 지역도 적지 않을 것이다. 중견·중소기업들이 관세 부담을 덤터기 쓰는 상황도 걱정이 된다. 수입업체가 치를 인상 가격 중 일부를 국내 제조사가 떠안게 되고, 이 여파가 원자재와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업체를 타격하는 식이 반복된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들은 현지의 고임금·고물가 장애물도 넘어야만 한다. 투자가 미국으로 빠져나가면서 국내 제조업의 공동화(空洞化)와 일자리 감소도 급속히 가속화될 가능성도 크다.
지난 2분기 우리 경제는 가까스로 0.6% 성장했지만 계속된 글로벌 ‘경기침체’에 ‘관세 파장’까지 더해지면서 올해 성장률 전망은 1%에도 미치지 못하고 0.8% 성장에 머무를 것으로 내다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짓눌러온 통상압력에서 일시적으로 일정 부분 벗어난 것은 다행스럽지만 향후 국내 산업과 고용시장이 직면할 이 같은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려면 무엇보다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 국내 투자환경 개선은 물론 해외 진출 기업들의 복귀를 돕는 ‘리쇼어링(Reshoring │ 해외 생산시설 본국 회귀)’ 정책 확대도 꾸준히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특히 국내에는 핵심 기술을 갖고 연구 개발 기능에 집중하는 ‘모(母) 공장’을 두고 해외는 생산 중심 기지로 활용해 산업 생태계를 지키는 ‘마더 팩토리(mother factory)’ 전략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대기업 중심의 대미(對美) 투자가 중소기업에 기회가 되는 동반성장 정책 또한 정부가 꼼꼼히 검토하고 면밀하게 보완해야 할 지점이다. 특히 신산업에 대한 과감한 정부 지원과 기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산업 정책도 절실하다. 그동안 ‘대기업 특혜’ 등 정치적 시각으로 막혀왔던 중견·중소기업 지원책도 서둘러 강구하고 과감하게 도입해야 할 시점이다. 결론적으로 글로벌 정글 생존 전략은 기술 경쟁력 높이고 투자환경을 개선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