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이 익어 가는 풍경', '마음을 비워 연향으로 채우는 시간', '염전에 흩날리는 바람, 꽃소금을 그릇에 담다', '메밀꽃 필 무렵', '오늘 새참은 뭘까', '그리운 할머니의 항아리 속 홍시'….
얼핏 그림이나 시 제목이 연상된다. 그러나 이 문구들은 모던 코리안 파인 다이닝 '시·화·담'의 메뉴다.
'밀이 익어 가는 풍경'은 태양 아래 밀이 익어가는 모습을 캔버스에 그린 그림 같다. 그러나 태양은 김치, 밀은 참깨를 묻힌 영양부추, 대지와 돌은 돼지고기와 마늘로 표현한 아트 요리다.
"음식에 한국적인 스토리를 녹여냈죠. 세계 어느 유명 음식에도 스토리가 없잖아요. 우리 모든 음식에는 스토리를 불어넣었어요.
서울 이태원동에 터를 잡은 시화담 오청(46) 대표는 "한국음식이 매우 아름답고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상호인 시화담도 시, 그림, 이야기가 있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지난해 8월 문을 연 이곳은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입소문이 났다. 특히 대기업들이 외국 VIP를 대접하는 음식점으로 유명하다.
5년 동안 구상한 20여가지 음식이 나올 때마다 푸드 디렉터의 설명과 그 설명을 요약한 프레젠테이션이 따라 붙는다.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 일본어 설명도 준비됐다. 음식을 먹으면서 2시간 가량 머물러야 하는 이유다.
오 대표의 부인으로 메뉴를 총괄하는 푸드 디렉터 박경원 이사가 이 모든 것을 총괄한다.
무슬림 고객을 위해 고기를 다른 요리로 대체하는 등 1~2일 전에 예약을 받아 고객의 취향도 적극 반영한다.
점심 10만원, 저녁 15·25·35만원 코스를 내놓는 이 레스토랑은 매월 2000만~3000만원씩 적자를 보고 있다. 35원만짜리 코스에 사용되는 20여개 그릇의 총 가격은 1000만원에 육박한다. 김희종, 이승호, 박소연 등 유명 도예가들의 작품이다. 고객 1명을 직원 1.5명이 서빙한다.
그럼에도 계속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 있는 배후에는 '신선 설농탕'이 있다. 오 대표의 부친 오억근(79) 쿠드 회장이 창업한 신선설농탕은 수도권에만 직영점 42곳을 두고 있다.
오 대표는 "신선설농탕이 단품으로 생계를 위해 빨리빨리 먹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면, 시화담은 느리게 접대하는 곳"이라면서 "두곳은 한식의 다양함을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오 대표는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공학도다. 부인은 경영학과 아동심리학을 복수전공했다. "부모는 내가 음식점 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러나 음식에 관심이 많은 부부는 한식요리사 자격증를 따는 등 결국 이 분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오 대표는 시화담을 통해 '한국은 훌륭한 음식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면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최근에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가서 유명한 가이세키를 다 먹어봤는데 음식과 그릇이 조화가 되지 않는 등 기대 밑이더라"면서 "맛뿐 아니라 분위기, 그릇, 서비스 등 다양한 요소를 새삼 깨달았다"고 알렸다.
박 이사는 "식당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 사람들에게 한식 요리를 가르쳐주는 쿠킹 스튜디오로 시화담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내비쳤다.
인사동에도 분점을 낸 시화담은 최근 '아름다운 한국음식 세계를 향해 날다'라는 책도 펴냈다. 시화담의 메뉴를 담은 요리 화보 에세이집이다.
어린 시절 개울가에서 멱 감던 추억, 한 톨의 쌀알을 얻기 위해 사계절 땀 흘리는 농부의 마음, 신사임당이 세상을 뜬 뒤 몸져 누운 율곡이 기력을 되찾게 된 사연, 녹두장군 전봉준의 의협심 등을 모티브로 탄생한 각종 요리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총 3000부를 찍었는데 1000부는 해외로 보낸다. 현지 대사관을 우선으로 학교 도서관 등에 비치토록 할 예정이다. 1000부는 한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500부는 서점에 깔았다. 가격은 2만8000원이나 3만5000원짜리 시식권을 덤으로 준다. 오 대표는 웃으며 말했다. "수익을 내려고 하기보다는 한국음식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한편, 오·박 부부는 이달 말 열리는 '서울 고메 2012(Seoul Gourmet 2012)'에서 시화담 요리를 선보일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