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소방관 자살 등 정신 건강 '적신호'
4명 중 1명 '공무상 질병' 불승인…"스스로 감내"
예산·인력·장비 열악…국가직 전환도 '반쪽짜리'
"소방관들은 더 이상 죽어서 영웅이 아닌, 살아서 행복한 영웅이 돼야 합니다."
제63주년 '소방의 날'(11월 9일)을 앞둔 지난 5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가 국회 본관 앞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은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을 촉구하며 이같이 밝혔다.
9일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헌신하는 소방관들의 희생과 노고를 되새기고자 마련된 '소방의 날'이다. 하지만 소방관들에 대한 국가의 체계적인 보호와 지원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는 사건, 사고 현장에서 마주하는 참혹한 경험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적신호'가 켜진 소방관들의 정신 건강이다.
이러한 문제는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 당시 현장에서 구조 활동에 나섰던 소방관 A씨가 트라우마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지난 8월 실종된 뒤 열흘 만에 숨진 채 발견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보다 한 달 전인 지난 7월에는 같은 현장에서 활동했던 또 다른 소방관 B씨가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B씨는 불안장애 등을 겪었으며, 질병휴직 및 장기재직휴가 등을 계속 써온 것으로 전해졌다.
소방관들의 자살은 적지 않은 수준이다.
소방청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10년간 자살 소방 공무원은 134명에 달한다. 이태원 참사 출동 소방관 2명을 포함해 올해 들어서만 8월까지 모두 7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동료와 함께 출동했다가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소방관들도 있다.
권영각 전국공무원노조 소방본부장은 "현장에서 순직하는 소방관들보다 자살하는 소방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며 "참사 및 출동에서 쌓이는 PTSD, 트라우마, 불규칙한 수면 등이 누적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소방청의 소방공무원 마음건강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설문에 참여한 소방공무원 6만1087명 중 PTSD를 겪는 이들은 4375명(7.2%)이었다.
자살 위험군에 해당하거나 우울증을 겪는 소방공무원도 각각 3141명(5.2%), 3937명(6.5%)이나 됐다. 수면 장애는 1만6921명(27.9%)에 달했다. 절반(46.8%) 가까이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4명 중 1명은 이러한 정신적 고통을 '공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방청과 인사혁신처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PTSD 등 '정신질환'으로 소방 공무원이 공무상 질병 요양을 청구한 건수는 총 122건으로, 이 중 91건(74.6%)만 승인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공무상 질병과 업무 연관성이 상당 부분 입증돼야 하는 데다 그 연관성을 '본인이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다보니 정신적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거나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황이다.
소방 노조는 "정부는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전문 치유 시설과 장기적인 보호 조치를 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으로 명문화하라"며 "아울러 소방관의 PTSD 등 정신 질환을 공무상 질병으로 명확히 인정하고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전히 열악한 예산과 인력, 장비도 개선돼야 할 문제다. 현장 소방관들이 희생될 때마다 뒤늦게 조직의 인력과 장비가 보강되고 있지만, 현장이 원하는 수준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내년 소방청 예산은 3295억원으로, 소방관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예산 51억원과 중형 헬기 등 특수 소방장비 확충 예산 182억원 등이 편성됐다.
그러나 화재 등 출동 시 지급되는 출동 가산금(수당)은 1회당 3000원으로 2014년 이후 11년째 제자리다. 이마저도 구급대원들은 출동 횟수가 1일 3회를 초과할 경우 1회당 3000원을 지급하며, 지급액은 하루 3만원을 넘을 수 없다.
내용 연수가 지난 방화복 등 낡고 오래된 장비로 화재와 재난 현장에 뛰어들거나 인력 부족에 따른 3교대 근무로 만성 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기도 하는 실정이다. 올해 6월 기준 소방 공무원 정원은 6만6881명으로, 증가폭은 크게 줄었다.
이해준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은 "국가는 언제나 우리 공무원들에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국가를 믿으라고 하면서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예산과 인력을 지원하지 않는다"며 기본적인 권리 보장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 8월 "근본적으로는 소방관 정원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소방청과 상의하고 관련된 기관과 협의해서 조속한 시일 안에 증원 계획을 만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2020년 4월 이뤄진 소방공무원 국가직 전환도 '반쪽짜리'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다. 노조는 국가직 전환 취지에 맞게 지자체 예산 의존도를 낮추고, 소방 재정의 안정적 확보와 독립적인 인사 운영이 보장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권 본부장은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순직하면 영웅으로 칭송한다"며 "그러나 소방관 그 누구도 죽어서 영웅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방관들은 더 이상 죽어서 영웅이 아닌 살아있는 영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소방의 날을 앞둔 지난 5일 소방관 12명을 대통령실로 초청해 오찬을 가졌다.
'몸살' 여파로 이재명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강훈식 비서실장은 "위험한 현장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늦게 나오는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국민 영웅"이라며 "특별한 희생과 헌신에는 그에 걸맞은 보상이 따를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뒷받침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