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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오열·체념이 공존했던 기독병원 7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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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오열·체념이 공존했던 기독병원 72시간
  • 조용석 기자
  • 승인 2014.04.23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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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유가족에게 병원은 더 이상 희망의 장소가 아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물에 불어터진 시신을 애끓는 심정으로 바라보며 신원을 확인해야 하는 곳이었고 정부의 어리석은 대응에 절망하는 장소였다. 그렇게 울었어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세월호 희생자의 2차 검안과 DNA 검사가 진행된 목포 기독병원에서의 힘겨웠던 3일(20~22일)을 소개한다.

◇20일…"내 자식을 왜 못 데려가게 하냐고요."

"육안으로 봐도 내 자식이 맞는데 DNA 검사를 왜 해야 하나."

지난 20일 오후 6시30분께 목포기독병원 장례식장.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은 울분을 토해냈다.

가족들은 DNA 검사 결과가 일치해야 시신 이송이 가능하다는 정부의 방침에 화를 참지 못했다. 안산 단원고 故 오모(17)군의 아버지는 "닷새 동안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는데 다음 날 올라가라고 하니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며 언성을 높였다.

한 학부모는 공무원과 몸싸움을 벌이다 땅바닥에 누워 오열했다. 안산·목포시 공무원, 경찰관, 소방대원들은 성난 가족들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또 다른 유족은 "팔이 오므라들고 손톱이 검게 변한 것으로 미뤄 나오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겠냐"면서 "아들을 데려가는데도 절차를 까다롭게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유족들의 절규는 2시간 넘게 이어졌다. 결국 시신은 기독병원 담당 공무원들과 조율을 통해 경기도 안산 등지로 옮겨졌다.

◇21일…"6일 동안 못 찾았던 누나 시신인데 왜 지금도 안되냐고"

21일 오후 11시51분께 기독병원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동창 회갑여행을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건넌 4구의 시신이 11시 51분부터 약 5분 단위로 안치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부는 희생자가 성인일 경우, 시신의 신원 확인을 위해 가족관계증명서를 요구했다. 하지만 유가족은 "한 밤 중에 어디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 받느냐"며 펄쩍 뛰었다.

유가족은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가 없으면 시신을 안 보내주는 것이냐"며 "시신이 여기 올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며 목청을 세웠다.

검안 과정을 지휘했던 검사는 성난 유가족에게 멱살까지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더욱이 시신 중 한 구가 바닥에 있던 것이 유가족을 자극하면서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유가족 중 한 명은 "시신을 함부로 해놓고 그것도 못 찾게 하고 있다"며 "6일 동안 물속에서도 못 찾았던 시신인데 이곳에 와서도 못 찾게 한다"고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22일…"짧은 눈물과 긴 한숨"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일주일째가 되는 22일. 돌아오지 않던 소중한 이를 기다리며 굵은 눈물을 쏟아낸 유가족들은 이제 흘릴 눈물도 줄어든 모습이었다.

오후 5시께 안산 단원고 故 김모(17)양의 시신이 안치되자 부부는 부둥켜 울며 흐느꼈다. 울음은 길지 않았지만 부부의 눈동자는 곧 초점을 잃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릴 힘도 없어 보였다.

오후 10시10분께에는 안산 단원고의 또 다른 김모(17)양의 시신이 기독병원에 도착했다.

딸의 시신 앞에서 10분 정도 울던 부부는 이젠 눈물조차 마른 듯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무덤덤하게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의 모습이 더욱 애처로웠다.

오후 11시50분께에는 김모(17) 군의 시신이 기독병원으로 들어왔다. 오히려 부인이 남편을 위로했다.

김군의 어머니는 "시신을 봐도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냥 살아있는 내 아들 같다"라고 말했다.

23일 오전 0시50분께 DNA를 검사하는 국과수의 차량과 해양경찰 등도 모두 철수했다. 이날 시신 검안이 모두 끝났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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