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대학사회가 학과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학의 본령이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에 있음에도 대학들이 취업률 등을 기준으로 삼아 무리한 학과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순수 학문 대신 취업이 잘 되는, 돈 되는 학과를 키우려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 순수학문은 사지로 내몰리고 이른바 취업이 잘 되는 인기 학과만 살아남는 서열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현상을 정권이 만든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조정으로 해석한다. 학문을 탐구하는 대학에 기업에서나 어울림직한 구조조정이라는, 경쟁력을 토대로 한 평가 방식을 도입해 학과를 무조건 통폐합하거나 없애는 방식으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지관 사학문제해결을 위한 연구회 회장(덕성여대 교수)은 한국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신자유주의적 방향에서 추진된 대학의 구조조정은 학령인구의 감소로 불가피한 면이 있으나, 전 정권은 이를 대학사이의 경쟁을 통한 도태라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며 "취업률 등을 기준으로 삼는 이 평가제 때문에 대학들은 교육의 본령보다 지표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장기적인 교육수요에 무관하게 사학설립을 마구잡이로 허용한 정책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교수와 학생 등 대학구성원에게 전가하는 셈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박근혜 정부가 이 파국을 피하려면 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사학우위의 대학편성을 국공립 위주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해야하고, 전 정권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강화시켜놓은 사학권력의 지배권을 약화시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가 이 방향을 취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데 비극이 있다"며 다소 우울한 전망을 내놨다.
이런 현상은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서울지역은 물론 전국에서 비슷한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지난 14일 중앙대 학생 100여명은 서울 흑석동 서울캠퍼스 본관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학교 측의 학과 구조조정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중앙대는 앞서 비교민속학과, 아동복지학과, 가족복지학과, 청소년학과 등 4개 학과 폐지 방침을 밝혔고 지난 18일 이사회에서 학칙개정안을 의결했다. 학생들은 학교 측이 민주적인 내부 논의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학과 구조조정을 결정했다며 재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4개 학과는 인문·사회계열에서 전공 선택 비율이 낮은 이른바 '비인기 학과'다. 학과 폐지로 경영학부, 경제학부 등 인기 전공들은 정원이 늘게 된다. 학교 측은 학과 구조조정에 대해 "경쟁력이 있는 학과를 집중 육성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대기업이 대학을 인수한 뒤 시작된 '경영 효율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중앙대는 지난 2008년 두산그룹에 인수된 뒤 77개 학과가 46개로 통폐합되는 구조조정 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학교 내에서는 구조조정 조치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총장실을 점거한 '중앙대 구조조정 공동대책위'(공대위)는 "학과 구조조정은 효율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구성원 간의 아무런 협의 없이 비민주적으로 강행됐다"고 비판했다. 공대위는 구조조정이 철회되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폐지되는 학과 학생들도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비교민속학 전공 학생들은 최근 발표한 성명서에서 "전국 200여개 대학 가운데 이 전공이 개설된 곳은 중앙대를 포함해 단 2곳뿐"이라며 "우리 민속문화를 세계에 알리며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비교민속학전공의 폐과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비인기 학과 구조조정은 다른 대학에서도 꾸준히 진행돼 온 하나의 추세다.
배재대는 최근 국문과와 독문과 불문과 등을 폐지하고 항공승무원학과와 사이버보안학과 등을 신설하기로 해 학생들의 반발을 샀다. 경남대는 철학과에 폐지 방침을 세웠다. 동국대는 지난해 윤리문화학과를 폐지하고 문예창작과와 국어국문과를 통폐합했다. 건국대는 2005년 불문과와 독문과를 합쳐 EU문화정보학과로 만들었다가 2008년 이 전공을 폐지했다.
폐지나 통폐합 대상 중 상당수는 다른 전공에 비해 취업률이 낮은 인문·사회 계열 학과다. 일각에서는 교육부가 대학 평가에 취업률 지표를 반영한 이후 이 같은 추세가 심화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학들이 정부 지원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순수 학문 대신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육성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오세영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인문학이라는 게 원래 직장에 취직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닌데 대학들이 취업률을 올리기 위해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며 "대학이 직업학교처럼 돼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오 교수는 또 "학생들이 졸업하고 취업하는 문제는 사회에 일자리가 얼마나 많은가에 의해 결정되는데 정부는 자기 책임을 대학 측에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육부는 대학평가에 취업률 지표를 반영하는 것이 순수 학문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관련 제도 보완에 나섰다.
교육부 관계자는 "그 동안 학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취업률 지표를 적용한 측면이 있었다"며 "순수 학문이나 비인기 전공 학과의 특성을 고려할 수 있도록 평가체계를 개선해 6월말께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