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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동대문 새벽시장에 가보니…'앗! 세상에 이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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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동대문 새벽시장에 가보니…'앗! 세상에 이럴수가'
  • 정의진 기자
  • 승인 2012.09.05 0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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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이 늘어난 헐렁한 티셔츠에 얇은 점퍼를 걸쳤다. 쫄바지에 엠보싱이 들어간 운동화는 필수다. 한 손엔 현금으로 가득 찬 두툼한 봉투를, 다른 한 손엔 물병 하나를 꼭 쥐었다. 스물넷 나이 어린 사장님은 습관처럼 긴 숨을 고르며 행동을 개시했다.

기자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마지막 날 서울 동대문 새벽시장을 찾았다. 밤 9시56분께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알록달록 네온사인이 만연한 거리에는 저마다 사정을 안고 상경한 옷가게 사장님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포스에 그렇지 않아도 좁은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광주에서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김은영(가명·24·여)씨도 이날 동대문을 찾았다. 이른바 물품을 사들인다는 뜻의 '사입'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눈을 붙이며 체력을 충전했단다. "내일 새벽 5시까지 계속 돌아다녀야 해요.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찾으려면 이 정도 수고는 감수해야죠." 김씨는 손에 한껏 들린 쇼핑백을 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순간 이상한 장면이 포착됐다. 수련회장에 도착해서 가방 검사를 받는 학생들이 줄지어 앉아있는 것 같기도 했고 전쟁통의 피난 행렬과도 흡사했다.

광주, 창원, 평택, 제주도 등 지명이 적힌 팻말 뒤로 사람 1명은 족히 들어갈 듯 한 가방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그 안에는 업자들이 밤새도록 발품 팔며 구매한 옷이 들어있다고 했다. 건물을 바꿔 돌 때마다 구매한 옷을 넣어놓는 패턴이다. 김씨도 서둘러 자신의 가방을 찾아 옷가지가 담긴 쇼핑백을 구겨 넣었다.

업자들이 옷을 사러 자리를 비우면 팻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른바 삼촌들이 가방을 감시한다. 보통 '사입 삼촌'이라고 불린단다. 지역마다 옷가게를 관리하는 사람들이다. 구(區)마다 나눠진 지역도 있다. 사입 버스를 대절하고 옷을 배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곧 김씨를 따라 들어간 곳은 '디자이너클럽'이라는 건물이었다.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업자들이 주로 찾는 곳은 디자이너 클럽을 비롯해 유어스(UUS), apm, 누존(NUZZON), 청평화 등 5곳이라고 했다.

2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비좁은 복도 사이로 걸음을 재촉하는 김씨를 졸졸 따라다녔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통로에 옷이 한가득 들은 봉투가 가득 쌓여 있었다. 업자들이 앞선 방문에서 주문해놨던 제품들을 내다놓은 것이다. 직접 찾아가거나 사입 삼촌들의 손을 빌려 얻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삼촌들에게 건당 3000원의 현금을 지불해야 한다.

건물을 돌아다니는 내내 김씨는 눈에 모터를 단 것 같았다. 양쪽으로 쭉 늘어선 옷가게에서 마음에 쏟 드는 '아이템'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원하는 물건이 없어 평소에는 가지 않던 건물도 돌아봐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처음 이곳에 온 사람이 있기에는 다소 어색했지만 김씨를 비롯한 업자들은 층과 층 사이를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제품을 구매 할 때 대화도 간단했다. "언니, 이거 어떻게 나왔어요"로 시작된 대화는 "광주 ○○○요"로 끝났다. 물건을 구입할 때 지역과 상점상호를 밝히는 것이 원칙이다. 구매량도 정해져 있다. 1장은 안판다. 최소 2장 이상 구매해야 한다.

단단히 여민 돈 봉투 사이로 녹색과 누런색의 지폐 수십장이 보였다. 소규모 오프라인 매장은 사입시 하루에 250만~300만원 정도, 규모가 큰 곳은 1000만원 이상 구매한다고 했다. 김씨는 "갖고 온 돈을 다 쓰지 못하면 일을 제대로 했다는 기분이 안 들어요. 그만큼 물건이 없다는 의미기도 하구요."

1만원에 산 옷은 2배로 높여 판다. 2만원은 1.9배, 3만원은 1.8배 등으로 값을 매긴다고 했다. 일명 '짝퉁'이라 불리는 이미테이션 제품은 구매가의 2배를 쳐도 사간단다. 지갑과 가방 등이 가장 수요가 높다.

오후 11시46분께 약 2시간만에 휴식이 주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잡채요", "김밥이요"라고 외치며 건물 복도 사이를 휙휙 휘젓고 다니는 배달 아주머니, 아저씨들 덕에 속이 매우 고픈 참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아기자기한 포장마차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김밥과 떡볶이, 순대 등을 내세운 분식집 형태였다. 빨리 먹고 움직여야하는 업자들의 사정을 파악한 포장마차 사장님의 전략인 셈이다.

20분이나 지났을까.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달랠 즈음, 작업이 재개됐다. 이제는 이미테이션 거리다. 도로변을 따라 노란 천막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천막 뒤로는 트럭들이 줄지어 주차돼 있었다. 상인 박모(33)씨는 "단속에 대비해 차량으로 가려놓은 것"이라며 멋쩍어했다.

1시10분께 갑자기 박씨의 손길이 빨라졌다. 이미테이션 거리를 밝히던 불이 모두 꺼지고 상인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감춰놨던 커다란 천을 꺼내더니 이미테이션 상품들을 덮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어두운 밤길에 빛마저 사라지니 눈 앞이 캄캄했다.

마침 형님이라 불리는 한 중년 사내가 단속이 떴음을 알리며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천막 사이로 경고등이 반짝거렸다. 경찰차 머리에 붙어있는 그것이었다. 김씨는 "물건을 구입하기는 힘들겠어요"라며 아쉬워했다. 이미테이션 거리 끝에 닿았을 때도 여전히 그 곳은 '암전' 상태였다.

갑자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오다말다'를 반복하며 업자들을 괴롭혔다. 사입 삼촌들의 손길도 분주해졌다. 업자들이 무려 8시간여를 돌아다니며 구입한 것들이다. 젖기라도 하면 낭패다.

시계를 미처 쳐다볼 틈도 없었다. 어느새 시간은 오전 4시46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가방에 빽빽이 들어찬 옷가지들을 보니 김씨는 뿌듯한 모양이다. 돌았던 건물을 돌고 또 돌아 가지고 온 돈에서 40만원만 남겼다.

김씨는 "이 옷을 어떻게 DP(Display)할까 벌써부터 고민돼요. 신상품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도 매우 궁금하구요"라며 설레어했다. 우선 버스에서 잠 좀 청해야겠다며 작별을 고한 그는 마지막으로 이 일이 자신의 천직인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아침 햇살이 아스라이 비치는 동대문은 전날 밤과 다름없이 활기찼다. 네온사인은 잦아들었지만 업자들의 발걸음엔 생기가 넘쳤다. 경기침체로 모두가 힘겨워하는 요즘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밤이었다. 우리나라의 패션문화 중심 상권을 명동이라 확정 지은 이는 누군가. 동대문의 밤은 명동의 낮보다 뜨거웠다.

    불 밝힌 동대문 패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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