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삼성 직업병’ 첫 인정…노동자 손들어
LCD 노동자 ‘다발성경화증’ 등 앓아
법원이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앓고 있는 희귀질환과 업무상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최근 항소심 재판부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데 이어 대법원도 처음으로 노동자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특히 희귀질환과 업무상 인과관계를 보다 전향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진행 중인 소송 등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9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및 법원 등에 따르면 그간 명확한 발병 원인이 드러나지 않은 희귀질환의 경우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 등이 이어져 왔다.
이날 대법원으로부터 인과관계를 인정 받은 이모씨 역시 하급심에서는 “발병 원인 물질에 일정 기간 노출됐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개연성만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판단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희귀질병과 근무 환경 사이의 인과 관계를 인정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리고 있다. 산재 인정 범위를 보다 폭 넓게 보는 모양새다.
앞서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엘시디(LCD)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다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 김모씨에 대해 요양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해당 사건은 삼성 LCD 공장 노동자가 희귀질환을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첫 사례로 기록됐다. 지난달 열린 항소심도 같은 판단을 내렸고, 공단이 상고를 제기하지 않아 원고 승소 판결이 확정됐다.
지난 5월에는 서울고법이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이모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공단과 1심이 업무 연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은 요양급여불승인 처분을 취소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 사건도 상고가 이뤄지지 않아 확정됐다.
대법원 역시 이날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 이모씨가 앓고 있는 다발성경화증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공단 또는 하급심에서 병과 업무 환경 사이 인과 관계가 인정된 바는 있지만 대법원이 같은 판단을 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련의 판결들은 희귀질환의 발병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고 판시한다. 업무와 재해 사이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 증명해야 하지만, 그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대법원은 입사 전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이씨가 근무 중 다발성경화증이 발병한 만큼 인과관계를 인정할 여지가 상당하다고 봤다. 상시적으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는 노동자에게 발병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희귀질환이 발병한 경우 전향적으로 업무와 인과관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아울러 사업주의 협조거부 등을 이유로 작업 환경상 유해요소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을 경우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고려해야 한다며 사업주에게 책임을 보다 무겁게 명시하기도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고자 하는 산업재해보험보상제도의 본래 목적과 기능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대법 판단은 진행 중인 소송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예정이다. 반올림에 따르면 2007년 황유미씨 유족급여신청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 5월 기준 근로복지공단에 83명이 산재 신청을 했다. 이 가운데 공단과 법원의 판결을 거쳐 산재인정이 확정된 사람은 모두 2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