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내가 진짜 잘하나? 여전히 나의 연기 의심"

2016-12-16     김지민 기자

그는 늘 빛을 냈다. 1999년 '내 마음의 풍금'으로 영화 시장에 들어온 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상승세를 거듭했다. 연기력이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더이상 증명할 게 없을 것처럼 보일 때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다시 한번 감탄의 연기를 뽐내며 등판한 그는 올해 배우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더 이상 내리막은 없을 것 같은 영화배우 이병헌(46)의 얘기다.

올해 국내 모든 영화 시상식을 평정했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내부자들'을 비롯해 '매그니피센트7' '밀정' '미스컨덕트' 등에서 대체불가의 연기로 이병헌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21일 개봉을 앞둔 영화 '마스터'(감독 조의석)도 마찬가지다. 그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는 연기'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시시각각 모습을 변화하며 사기 행각을 벌이는 '진현필'을 그는, 특유의 세밀한 캐릭터 조형으로 완성해냈다.

이병헌은 천상 배우다. 악한 인간을 연기할 때도 악함의 근원을 풍기는 아우라를 전한다. 한국 영화계를 넘어 할리우드에서까지 그와 함께 영화를 완성하려는 이유다.

이병헌은 어떨까. 상찬(賞讚)이 넘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연기를 의심하고 있었다. "자신을 객관화하기는 불가능하기에 자꾸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영화 '마스터'를 배경으로 그의 연기철학을 들어봤다.

-다음 주에 개봉이다. 어떤 기분인가.

"어제(14일) 일반 시사회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하더라. 기분 좋게 기다리고 있다."

-'내부자들'은 지난해 11월 개봉했으니 제외하더라도, 올해 출연 작품만 네 편이다.

"네 편인가."
-'미스컨덕트' '밀정' '매그니피센트7' '마스터'. 많은 작품에 나왔다.

"외화가 다소 아쉽다. 홍보할 때 배우들도 다 오고 그래야 좋은데, 혼자 하려니까…. 심지어 인터뷰도 못 했다. '매그니피센트7' 같은 경우는 제목이 아쉽다. '황야의 7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향수를 느낀 관객들이 왔을 것이다. '매그니피센트'는 미국 사람들도 발음하기 힘들어 한다.(웃음) 어쨌든 '매그니피센트7'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고, 그만큼 기대도 많이 했던 작품이라 아쉬운 면이 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평가는 아쉽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 '이병헌의 연기'는 이미 아주 예전부터 인정받았던 것인데, 유독 최근 들어 연기 칭찬이 많다. 어떻게 생각하나.

"기분은 좋은데, 나에게 물어본다. '내가 진짜 잘하나.' '나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생각들.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힘들지 않나. 내가 연기를 엄청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이 연기에 좋게만 작용하지 않는다. 몸이 경직되고, 그러면 발버둥치는 듯한 연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자유로워야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으니까."

-이번 작품에서는 어땠나.

"부담감을 떨쳤는지 나도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촬영장에 가면 내 마음을 쓸어내리는 느낌을 가지려고 했다. 본격적인 운동을 하기 전에 준비 운동을 하는 것처럼."

-'마스터' 이야기를 해보자. 첫 장면이었던 프레젠테이션 시퀀스부터 강렬했다. 분명히 사기치고 있다는 걸 아는데, 묘하게 설득력 있더라. 어떤 고민을 했나.

"관객이 느끼기에 저 정도면 속을 수도 있겠다고 믿게 하고 싶었다. '저 사람들이 바보같이 속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끔 연기하려 했다.프레젠테이션 대사를 만드는 데 한 달 이상 걸렸다. 더 믿음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진현필이 감정을 드러내며, 눈물 훔치는 장면이 없다."

-제작보고회 때, 그 장면에 대해 고민을 말했었다."초반 장면 치고는 다소 길지 않을까, 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 장면이 '어떤 사기꾼이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중'이라는 것에서 그치면 관객이 극에 빠지지 못 할 거라고 봤다. 관객 또한 '무슨 저런 사기꾼이 다 있나' 탄식할 정도가 돼야 한 거다."

-진현필의 정체성은 '말'인 것처럼 보인다. 연설 장면은 물론이고, 필리핀에서 필리핀식 영어를 구사하는 점, 상대에 따라 말투가 각각 달라지는 게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는 듯했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다. 진현필의 어떤 점에 끌렸고, 어떤 걸 강조하고 싶었나.

"진현필의 매력은 배우의 속성과 일치한다. 배우는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나. 늘 변화하고 싶어한다. 배우로서 그런 내 욕망이 진현필에게 있었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순식간에 눈빛이 변하고 말투도 변하는 인물이니까, 어떤 배우가 이런 역할을 마다하겠나. 어떤 때는 차갑게, 설득력있게, 젠틀하게, 친근하게 변화하는(이 부분을 말할 때, 이병헌은 실제로 차갑거나 설득력 있거나 젠틀하거나 친근한 표정을 각각 지어보였다) 진현필이 매력적이었다."

-한국영화에서 악역을 맡은 게 '놈놈놈'과 '마스터', 딱 두 번이다. '놈놈놈'의 '박창이'는 이 사람이 왜 악당이 됐는지 최소한의 설명이 있었지만, '마스터'의 진현필은 밑도 끝도 없는 악당이다. 어떻게 접근했나.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소설처럼 죽 읽지 않나. 재밌었고, 진현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연기하려니까, 내가 잘 설득이 안 되더라. 말한대로 밑도 끝도 없으니까. 자칫 이 인물이 '그냥 나쁜놈', 그러니까 매우 평면적인 인물이 될 것 같았다. 아주 작은 것들인데, 이 인물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 합리화에 능한 인물로 만들려고 했다."

-예를 들면 어떤 건가.

"살인교사를 한 뒤에 뉴스를 통해 그 소식을 듣는 장면이 있지 않나. 원래는 그냥 씩 웃고 끝나는 것이었는데, 웃지 않고 '그럼 뭐 어떡하라고'라는 혼잣말을 넣었다. 죄책감을 느끼지만, 순식간에 자기 합리화를 하는 인물이었으면 했다. 다른 장면에도 이런 부분이 들어있다. 악행을 하지만, 악행에 대한 합리화 시스템이 매우 빠르게 작동한다고 생각하니까 진현필에 접근하기 용이했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몇몇 장면들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먼저 앞서 언급된 필리핀식 영어 구사 장면이다. 디테일한 연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진현필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순간순간 얼굴과 감정을 바꾸는 사람이다. 상대를 반드시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것이다. 필리핀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까, 필리핀 영어를 하는 게 진현필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필리핀 배우 세 명에게 각각 대사를 녹음해 달라고 했다. 세 배우의 감정은 다 다르니까, 스타일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필리핀식 액센트는 공통적이었다. 그 공통된 특징들을 중심으로 대사를 반복해서 연습했다. 예를 들면, 된소리가 많이 나오는 식으로. 나중에는 재밌더라."

-영화 초반부 진현필·김엄마·박장군 세 사람이 손을 맞잡는 장면은 코믹하기도 하면서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세 명이 손을 잡는 장면까지는 시나리오에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현재의 성장에 안주하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진현필의 마음이 그 장면에서 드러났으면 했다.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다. 사훈(社訓)을 외친다든지, 사가(社歌)를 부른다든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다가 손등에 뽀뽀를 하는 걸로 정했다.(웃음)"

-왜 뽀뽀인가.(웃음)

"애들이 싸우면 억지로 악수하고 서로 안아주라고 하지 않나. 그런 느낌을 내고 싶었다.(웃음)"

-듣다보니 진현필 캐릭터를 만드는 데 아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영화를 할 때도 그런 편인가.

"영화에 따라 다르다. 현재 촬영 중인 '남한산성' 같은 경우에는 애드리브가 없다. 물론 어떤 장면에 대해서 감독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건 마찬가지다. 다만 '내부자들'과 '마스터'의 캐릭터는 애드리브가 많이 허용될 수 있는 캐릭터라고 봤다. 애드리브가 신(scene)의 목표와 의도를 흐린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애드리브가 목표와 의도를 풍성하게 해준다면 좋을 수 있다. 사실 난 애드리브를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올해는 아무래도 연기 인생에서 잊지 못할 한 해가 될 것 같다. 거의 모든 시상식을 휩쓸었고, 그 어느때보다 이병헌의 연기에 대한 상찬이 많았다. '마스터'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올해는 어떤 해였나.
"행복하게 바빴다. 이 영화, 저 영화 프로모션 다니고, 이 시상식 저 시상식 상 받으로 다니고.(웃음) 사실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인터뷰 하니까, 기자들이 정리를 해준다.(웃음) 상을 받으러 다닌 시간만 해도 다 합치면 한 달이 될 거다."

-이렇게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나 할 수 있을 정도의 왕성한 활동이다. '싱글라이더' 촬영을 마쳤고, 차기작으로 '남한산성' 촬영 중이고, 차차기작이 확정됐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쉴려고 마음만 먹으면 쉴 수 있지 않나. 왜 안 쉬나.

"쉬고 싶다는 생각은 하는데, 자꾸 좋은 작품이 모인다.(웃음) 배우로서 또 그런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머릿속으로는 자꾸 작품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뭔가를 안 할 수가 없다."

-앞선 인터뷰에서는 특별한 목표가 있었던 적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한국 활동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그렇다면 할리우드에서의 활동도 마찬가지인 건가.

"그렇다. 특별한 목표는 역시 없다. 다만, 어떻게 한 판 더 시원하게 놀지 생각한다. 그냥 해볼 수 있을 만큼 끝까지 해볼 생각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한국에서 영화할 때처럼 시원하게 놀아봤다라는 느낌을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면서 아직 느껴보지 못했다. 핸디캡이 있으니까. 처음 할 때는 경직돼 있었고, 그냥 감독이 시키는대로 했다. 다른 배우들과 영화에 관해 대화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매그니피센트7'을 할 때는 달랐다. 나도 할리우드에 적응하고 있지 않겠나. 이번에는 감독과, 배우들과 우리가 촬영하는 영화에 대한 대화도 나누고, 내 느낌대로 대사도 바꿔볼 수 있었다. 여기서도 조금씩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느끼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가고 싶은 거다."

-핸디캡이라는 건 언어를 말하는 건가.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까지 포함된다. 예를 들어 내가 화나거나 슬플 때 짓는 표정은 내가 살아온 문화를 바탕으로 나오는 거다. 하지만 여기는 우리와 문화가 다르다. 표정이 다를 수 있다. 이들이 볼 때 내 표정은 어떤 것일지 고민하게 된다. 난 정말 진실된 연기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볼 때는 왜 저렇게 촌스러운 연기를 하는 것냐고 말할 수도 있는 건 아닌가."

-마지막 질문. '마스터'는 어떤 영화인가.

"시국과 맞닿은 부분도 있지만, 어둡지 않고 경쾌하고 밝은 작품이다. 우리 영화가 위로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