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긴장, 착잡한 마음, 묵직한 여운…'프로즌'
대학로에 또 하나의 수작이 나왔다. 극단 맨씨어터의 신작 연극 '프로즌(Frozen)'(작가 브리오니 래버리)이다. 내용은 차갑고 배우들의 연기는 뜨거우며 관객들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러닝타임 110분이 지난 뒤 찾아오는 여운은 묵직하다.
◇매력
▲얼어붙은(frozen) 마음
연쇄 살인자에게 어린 자녀를 잃게 된 엄마 '낸시',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한 연쇄살인범 '랄프', 다양한 사례의 연쇄살인범을 연구하는 정신과 의사 '아그네샤'의 삶이 교차되는데 이들의 마음은 모두 고장나거나 망가져 얼어붙었다.
낸시는 딸 '로나'를 잃어버리고 20년 간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는데, 그런 로나를 숨지게 한 랄프는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심한 정신·육체적 학대를 받아 뇌가 얼어붙었다.
연쇄살인범에 대해 연구하는 아그네샤는 랄프를 포함한 이들이 신경 조직망이 망가져 그와 같은 일을 벌인 것으로 판단하는데 자신과 절친한 친구의 남편인 '데이비드'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가 사고를 당하자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랄프는 말한다. "가끔 세상은 당신의 뒤통수를 치고는 원하지 않는 곳으로 당신을 데리고 갈 겁니다." 그에게 뿐 아니라 낸시·아그네샤에게도 세상은 그렇다.
▲배우들의 불 같은 연기
이 얼어붙은 마음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뜨겁다. 실제 엄마이기도 한 낸시 역의 우현주는 연습 내내 가슴이 아팠다고 했는데 동생 로나가 없어지고 난 뒤 죄책감에 시달리는 언니 '잉그리드'까지 오가며 애달픔의 절정을 보여준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랄프 역에 몰입했던 이석준은 관객들이 그 역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호연을 보여준다. 잔인한 연쇄살인범 랄프는 미워해야 마땅하지만, 그의 과거 트라우마가 불쑥 불쑥 나타날 때 이석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손으로 수차례 얼굴을 때릴 때가 그렇다.
낸시와 랄프 사이에서 중심 축을 잡기 힘들었을 아그네샤 역의 정수영은 지적이고 분석적인 면모에 숨겨진 흔들리는 감정선을 균형있게 연기해나간다.
'프로즌'은 특히 형식이 눈에 띄는 작품인데 약 50분 간 세 배우의 독백으로만 극이 이어진다. 나중에 서로 만나게 되는데 대사들은 일상의 언어라기보다 시에 가깝다. 게다가 무대도 테이블 하나에 의자 3개, 그 뒤로 로나가 썼던 물건 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전부인데 배우들은 막판 잠시를 빼고 내내 무대 위에 있어야 한다.
자기 대사나 행동에 대한 지문이 없어도, 다른 인물이 독백을 할 때 무대 위에 있다. 연출을 맡은 김광보 서울시극단 단장(전 극단 청우 대표)은 "한 사람이 이야기를 통해 내놓는 경험치에 대한 반응을 보이기 위해" 등·퇴장을 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프로즌'은 김광보 식 단출함이 인상적인 미니멀리즘이 절정인데 이는 그가 평소 지닌 "연극의 주체는 배우"라는 소신의 산물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아닌 다른 형태는 최대한 단순화하면서 역으로 배우의 에너지로 빈자리를 채우는 그의 특기가 빛을 발한다.
▲혼란의 감정 끝에 오는 위로
공연장 안에서 오롯이 생각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은 관객을 위해 결말은 자세히 밝히지 않지만, '용서' 또는 '복수'의 다양한 결에 대해 고민케 하는 작품이라는 것은 적시하고자 한다.
낸시는 랄프를 찾아가기 전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났을 때 발생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인지하고 가는데 이는 랄프의 결말을 그녀가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수렴될 수 있다. 랄프는 결국 보내지도 못하는 사죄의 편지를 써놓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랄프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장면. 낸시와 아그네샤는 이를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는데 친구에 대한 죄의식으로 시달리던 아그네샤는 낸시에게 데이비드와 불륜 사실을 털어놓는다. 이 사실을 친구에게 이야기해야 되는지 묻는 아그네샤에게 낸시는 답한다. "죄와 함께 살아요." 이는 아그네샤뿐 아니라 랄프를 겨냥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섬뜩할 수도 있는 이 결말이 또 당혹스러운 이유는 예상치 못한 위로 때문이다.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사회적 부조리는 누구나 죄의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지난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세월호 참사'의 부모처럼 낸시도 자식을 잃었다는 자체로 죄의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아그네샤는 자신에게 "내가 고장 난 사람이라는 겁니까"라고 묻는 랄프에게 말한다.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당신 잘못은 아니에요.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거예요."
내내 긴장감이 바싹바싹 조여오는데 공연장의 적막감은 침을 삼키기도 힘들게 해 관람이 쉬운 작품은 아니지만, 그 만큼 촉각을 세워 지켜보다보면 '연극 보기'의 참 맛을 느끼게 해준다.
◇유일한 단점
초연작임에도 프리뷰 공연 4회 포함 22회 일반 공연, 거기에 연장된 9회 공연의 티켓이 매진됐다.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 셈이다. 티켓을 양도 받거나 취소를 기다리는 수밖에.
7월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랄프는 이석준과 함께 박호산이 번갈아 연기한다. 번역 차영화, 윤색 고연옥, 무대 정승호. 극단 맨씨어터. 02-744-7661
얼음·불 오가는 사회 위로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