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폭, 명성황후의 저주와 해원”
을미년 3.1절 아침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만세 부르던 파고다 공원도, 유관순 열사도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히로시마였다. 히로시마….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 하늘에는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죽음의 버섯구름이 18㎞ 상공까지 치솟았다. 히로시마 상공 580m 지점에서 핵폭탄(리틀 보이)이 역사상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인류 최초의 핵공격 지점이 하필 히로시마였을까? 왜 히로시마가 핵 재앙의 첫 제물이 되었을까?
히로시마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략의 전진기지였으며, 1894년에는 대본영이 설치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병력을 보낸 곳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히로시마가 희생물이 된 것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이끈 군사령부가 위치했기 때문이라거나, 이전까지 한 번도 공습을 받은 적이 없는 도시였기 때문에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란 분석을 했다.
하지만 군사거점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민간인의 희생을 각오하고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생각을 했다면, 다른 대도시가 목표물이 되었어야 더 설득력이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탐험하는 필자의 눈에는 히로시마의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895년 음력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의 옥호루에 20여 명의 일본 낭인들이 난입,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한다. 낭인들 중 에조(英藏)가 작성해서 일본 본국에 보낸 일명 ‘에조 보고서’를 보면 차마 입에 올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우리에게는 치욕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다.
시해된 명성황후는 믿기 어려운 능욕을 당하고, 그 시신은 향정원의 녹원에서 황급히 불살라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명성황후는 국모로서는 물론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일본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분수령으로 조선을 장악하고 대륙 진출의 발판을 다졌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일본은 세상에 인과응보의 섭리 같은 건 없는 듯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명성황후의 저주는 서서히 나타났다.
일본 낭인과 함께 행동하며 명성황후 시해에 앞장선 조선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히로시마 인근의 구레(吳)시에서 고영근에게 피살되는가 하면, 우범선과 함께 행동한 이두황의 묘는 1951년 당시 빨치산 토벌대 18대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경무관 추서)과 독립운동가 김지강 선생이 찾아내 부관참시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화장을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죽은 다음에도 틀림없이 응징을 당할 것이란 두려움에 떨었던 것 같다.
악행을 저지른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와 졸개 낭인들은 사실 하수인에 불과했다. 진짜 주범은 당시 일본을 이끌던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 외무대신출신 이노우에 가오루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정부였다.
을미사변 14년 후인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의 육군중장 안중근에게 사살 당했다. 안중근 장군은 재판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나열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였다. 해방까지 우리가 벌여온 독립운동과 극일운동의 시발점이 을미사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으로 몰아가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 장면을 목격한 외국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프랑스 ‘리용프와어’ 신문 등 각자 본국 매체에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가령 1895년 10월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의 보도에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까지 통렬하게 파헤쳤다.
일제를 비판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전 세계적으로 들끓자 일본 정부는 시해범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전부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겼다. 하지만 용의자 전원을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고, 이들은 오히려 구국의 영웅으로 박수갈채를 받으며 입신출세의 길을 내달렸다.
핵심 인물이었던 시바 시로우는 하버드 대학 수학 경력을 내세워 중의원에 수차례 당선되고, 낭인 동원책이었던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내각의 내상(내무부장관)에 오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범 대부분은 정치 요직에 발탁되거나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 후 동아시아를 장악한 일제는 1941년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세계를 제패할 듯 보였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으로 일본 국민들은 더없는 굴욕과 공포, 그리고 나라의 패망을 안고 말았다. 히로시마는 명성황후 시해범들을 무죄로 방면한 바로 그곳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50년 되는 해에 히로시마가 원폭을 맞은 것이 명성황후의 해원(解寃)이라면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었을까.
최근 일본은 파렴치한 역사왜곡을 자행하며 주변국들을 자극하고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 게다가 분단국인 대한민국은 일본과의 협력으로 통일의 지렛대로 삼아도 모자랄 판인데,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고 있다.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동반자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본은 엉뚱한 문서나 불충분한 근거를 들이밀며 위안부, 독도 문제에 트집을 잡고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일본 대다수의 국민들은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이런 비틀어진 일본의 행태에 일침을 놓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역사의 죄목은 무엇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이 사실은 변명의 여지없이 명명백백하다.
지금까지 한국은 일본을 수없이 규탄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서만은 조용했다. 대한민국은 이 만행에 대해 그 어떤 역사적 사안보다도 먼저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해야한다. 120년이 지나 새로운 을미년을 맞이하여 일본 또한 미래의 번영을 바란다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부터 진심으로 사죄하여 냉혹한 인과의 짐을 덜고 가야 한다.
◇차길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100년만에 간도 반환소송 접수 ▲2014년 화관 문화훈장 수훈 ▲넥센 히어로즈 프로야구단 구단주 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