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 풍성' 눈이 즐겁다…영화 '상의원'

2014-12-24     손정빈 기자

상의원(尙衣院)은 조선시대 임금과 왕족을 비롯한 왕실의 의복과 재물을 제작, 공급, 관리하는 일을 맡던 육조(六曹) 중 공조(工曹)에 속한 관청이다.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실제 상의원은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등 궁궐마다 있을만큼 중요한 기관이다. 또 왕이나 왕비의 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왕과 왕비를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상의원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왕, 그리고 왕실과 상당히 밀접한 기관"이라고 말한다.

얘기만 들어도 흥미롭지 않은가. 상의원은 한국 사극이 다루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다. 다뤄진 적이 없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소재로 충분한데 게다가 왕실과 밀접한 기관이었다니 굳이 상상력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이야깃거리는 풍부할 것이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전문직 드라마(드라마 '대장금')를 만들어낼 수 있다. 왕실의 권력 다툼을 의복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영화 '관상')이다. 상의원의 어침장(수장)이 되면 천민도 양반이 될 수 있었다고 하니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드라마 '하얀거탑')도 있을 수 있다. 의복 제작을 하나의 예술로 본다면 조금 뻔하기는 하나 천재를 향한 범인의 질투(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소재로 삼을 수도 있다. 다 떠나서 한복의 멋진 디자인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볼거리는 충분하다.

이원석 감독은 영화 '상의원'에서 소포모어(2년차) 징크스를 넘어보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2월 '남자사용설명서'로 호평 받았던 그는 앞서 언급한 상의원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영화 속에 모두 쓸어 담았다. 소포모어 징크스의 이유는 간단하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만심, 다른 하나는 부담감이다. 이원석 감독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했을까.

30년 동안 왕실의 옷을 지어온 상의원 어침장 임돌석(한석규)은 6개월 뒤면 양반이 된다. 어느 날 왕의 면복을 손보던 왕비(박신혜)와 시종들은 실수로 면복을 태운다. 돌석마저도 옷을 손보기에는 무리인 상황. 하룻밤 만에 옷을 고칠 사람이 필요한 왕비는 궐 밖에서 옷 잘 짓기로 소문난 이공진(고수)을 궐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원석 감독의 전작 '남자사용설명서'는 감독 특유의 감각으로 단순한 서사를 매력적으로 살려낸 영화였다. 로맨틱 코미디가 피해갈 수 없는 클리셰를 코미디로 변환하고, 빠르고 기발한 편집으로 지루함을 없앴다. 배우의 개인기에만 기대지 않기 위한 영화적 설정들도 나쁘지 않았다. 이원석 감독은 코미디 영화에 어울리는 재주를 보여줬다.

이 감독은 '상의원'에서 마치 '나한테 잔재주만 있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정한 듯 풀어내는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상의원'에는 먼저 많은 영화가 수없이 다뤘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이야기가 있다. 콤플렉스를 가진 왕과 권력을 탐하는 신하의 다툼이 있다. 왕과 왕비의 비극적인 사랑도 있고 예술가와 뮤즈의 만남도 들어있다. 전형적인 삼각관계도 있다.

그러면서도 코미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어넣은 몇몇 장면은 이 영화가 '남자사용설명서'를 만든 감독의 영화라는 걸 알게 하지만 기본적으로 '상의원'은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연출 방식을 택했다. 두 번째 작품은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과잉의욕 때문이었을까. 이원석 감독의 시도는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다양한 서사들이 통제되지 않아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싶은 건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각각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 모두 담다보니 층층이 알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태로워보인다.

'상의원'을 관통하는 한 단어는 '관계'다. '상의원'은 왕과 왕비의 관계, 공진과 돌석의 관계, 왕과 돌석의 관계, 공진과 왕비의 관계, 왕과 왕비 그리고 돌석의 관계가 맞물려 극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구조다. 그렇다면 이 관계들이 깊이 있게 다뤄져야 한다. 이 많은 관계를 하나로 꿰기 위한 연결고리인 에피소드도 필요하다. 그렇다보니 러닝타임은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데 소모되고 정작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관계의 깊이'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상대적으로 깊게 다뤄지는 게 공진과 돌석의 관계인데 천재와 천재를 질투하는 범인의 심리는 이미 너무 많은 텍스트가 있어 큰 감흥을 주진 못한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쪽은 왕과 왕비, 공진의 관계인데 영화는 이 미묘한 부분을 고민 없는 대사를 통해 '퉁' 처리함으로써 극 절정에서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장르의 균형을 잡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극 초반부에서 보이는 이원석 식 코미디가 정통 사극으로 흐르는 후반부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전문직 드라마와 휴먼 드라마, 멜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편집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야기는 헐겁지만 볼거리가 많아 지루하지 않은 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상의원'은 의상 제작비로 10억원을 써 1000여 벌의 한복을 만들어냈다. 그 중 돋보이는 건 천재 디자이너 이공진이 만드는 의상이다. 이공진의 탁월한 색감과 진보적인 디자인 감각은 한복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공진이 입고 있는 한복은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아름답다.

배우들의 연기는 안정적이지만 인상적인 캐릭터는 없다. 배우들은 나름대로 '성격'을 연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재가 이원석 감독에게 오히려 독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의욕에 찬 감독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담백한 소재와 명확한 서사였는지도 모른다. 이원석 감독 역시 소포모어 징크스란 돌부리에 걸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