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라면 못할 것 없는 세상"… 이제는 바꿔야 할 때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라는 속담이 있다. 한국인의 지나친 공짜 의식을 지적하는 대표적인 옛말이 최근 연일 회자되고 있다.
이 속담이 최근 다시 도마에 오른 이유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무상복지 시리즈' 탓이다. 여야가 앞 다퉈 쏟아낸 무상 시리즈의 후폭풍 역시 공짜 의식의 연장선이다.
선거 때마다 유권자들의 공짜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어 어김없이 등장하는 선심성 공약(空約) 남발은 '나랏돈은 눈먼 돈'이라는 정치권의 얄팍한 정치 술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사행심을 부추기는 복권 열풍이나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는 값비싼 경품 행사 등도 이와 무관치 않다.
특히 이른바 '한 방'으로 인생역전을 노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운에 기대 이른바 '대박'을 노리다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가 독버섯 처럼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또 경기 불황으로 기업들은 앞 다퉈 온갖 감언이설로 공짜 마케팅을 펼치고 있지만 꼼꼼히 확인하지 않으면 자칫 개인정보만 유출하는 '호갱님(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손님을 지칭하는 신조어)'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 밖에 ▲노인대상 공짜 효도관광 빙자 물품 사기 ▲스마트폰 공짜 교체 사기 ▲여행 상품권 당첨 상술 등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악덕 상술과 범죄는 열거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다.
공짜란 말에 혹했다가 낭패를 본 사례는 정치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무상복지 시리즈 탓에 전국 지자체장들은 사실상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국민들은 '더 이상 증세 없는 복지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우리사회의 만연한 공짜 의식이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공짜 의식에 기인한 갈등이 사회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원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뿌리 깊은 공짜 의식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한국사회 흔드는 '공짜'…원인은 '불안'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요행과 운을 바라는 심리가 퍼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곳에서 공짜를 좋아하는 심리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노력으로 결과를 성취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강할수록 이 심리가 더 강해진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공짜를 좋아하는 심리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며 "이는 우연에 의해 생기는 보상을 지속적으로 바라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했다.
황 교수는 "공짜 심리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특정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엄청난 출세나 부를 누린다'고 믿는 사회에서 주로 발생한다"며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노력을 인정하지 않고, 운에 의해서 쉽게 됐다고 믿으려는 마음이 강할수록 공짜 심리가 강해진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공짜를 좋아하는 당연한 심리를 악용하는 일부 기업가나 정치인의 행태가 문제라고 봤다.
조영일 성신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공짜라고 하면 의심부터 하는 것이 정상인데, 공짜라는 이미지가 주는 효과를 악용하는 기만책·유인책이 문제"라며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자나 유권자에게 비용을 받아내게 된다"고 지적했다.
◇'무조건 퍼주기' 무엇이 문제인가
전문가들은 기대만큼 실망을 키우는 공짜 문화가 결국 사회 전체적인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 구성원 사이에 피로감과 불신이 쌓이면서 냉소주의가 전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사기 범죄에 속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공짜 물품을 구입할 때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공짜라고 과장·허위 광고를 하면 결국 기업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등 손해가 부메랑처럼 돌아갈 것"이라고 짚었다.
정치권에서 남발하는 책임감 없는 '공약(空約)' 역시 공짜 심리를 악용한 것이라며 지적도 나왔다. 유권자의 기대를 높여놨다가 실망과 불신만 키운다는 의견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정치권의 선심성 공약은 책임감 결여가 원인"이라며 "본인이 지킬 의사도 없으면서 책임감 없이 약속해도, 받는 쪽 입장에서는 공약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를 지니게 된다"고 꼬집었다.
곽 교수는 "한 쪽에서 허황된 기대감을 부추기면 반대 쪽에서도 상승효과를 가져온다"며 "예를 들어 한 정치인이 선심성 공약을 내놓으면 다른 정치인은 더 심한 공약을 내놓아 기대 심리를 키운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도 커지고,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서로간의 불신이 깊어진다"며 "사회 전반적으로 피로감과 불신이 쌓이면서 냉소주의가 전반에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값 받는 사회 문화 만들려면
전문가들은 공짜에 속지 않고 제값을 받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려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인식을 확고히 지녀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기적으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교육 등 시스템적인 측면을 보완할 것을 제안했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공짜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며 "소비자단체 등 시민단체들이 이 현상에 대한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잘못된 사안을 제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상품을 팔 때 왜곡이나 과장 광고를 하면 공정거래법 위반 등 규제할 수 있는 제도가 이미 있다"며 "하지만 규제가 효과적으로 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이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전문가는 피해를 본 소비자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것에서 나아가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사전 교육을 시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정치 분야로 확대하면 후보자들의 공약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교육과 캠페인을 강화하자는 의견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심리학과 교수는 "소비자 교육 등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며 "소비자를 돕는 활동을 지원하는 정부 정책이나 법은 미흡하지만, 향후 제도적으로 보완되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단순히 사후적인 문제에 집중하면 비용이 더 많이 든다"며 "사전 교육을 확대해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돕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의미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