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듯 다른' 5·18 민주화운동 경과보고

2014-05-18     송창헌 기자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경과보고가 같은 식순이지만 사뭇 다른 내용으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경과보고는 국립 5·18묘지가 완성된 1997년 이후 줄곧 상주(喪主)인 5월 단체 고유의 몫이었다.

2007년까지 정수만 5·18 유족회장이 보고했고, 2008년에는 신경진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장이 맡았다. 그러다 2009년에 보훈청이 직접 맡기로 하면서 그해 장갑수 광주지방보훈청장이 5월 항쟁의 경과를 보고했다.

이어 2010년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경기민요인 '방아타령' 연주 논란 등이 겹치면서 경과보고가 식순에서 아예 빠졌고, 이후 2011년부터 4년 연속 광주보훈청장이 맡고 있다.

국가피해 당사자인 5월 단체에서 국가기관인 보훈청으로 넘어가면서 경과보고는 한결 간결해졌고, 형식화된 측면도 강해졌다.

올해 경과보고 역시 발생 경위, 기념일 제정, 주요 경과 순으로 3분 남짓 분량으로 소개됐다.

두 줄짜리 짧막한 발생 경위와 함께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1980년 5월20일 광주시민 저항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광주시민 해산 시도 ▲1997년 5월9일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제정 ▲2002년 1월26일 광주민주화유공자 예우법 제정 ▲2002년 1월20일 국립 5·18민주묘지 승격 등 굵직한 흐름 11개로 34년의 역사를 압축했다.

그러나 유족회장이 마지막으로 경과보고를 한 2007년 경과보고는 A4 4장 분량으로 5월 광주의 상황을 피해자 입장에서 가감없이 전달했다. 정 회장 스스로도 계엄군의 총탄에 둘째 동생을 잃은 피해자였다.

당시 정 회장은 "5·18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로 국가권력을 강점한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서 5월18일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과 계엄군의 충돌로 시작됐으며, 이날부터 시작된 계엄군의 유혈진압으로 광주는 순식간에 계엄군의 진압봉에 맞아 흘린 시민의 피와 비명, 아비규환의 도시로 변했다"고 밝혔다.

이어 5월20일 차량시위와 21일 계엄군의 무차별적 총격, 시민들의 헌신적인 헌혈 행렬, 치안부재 상황에서도 빛났던 시민자치공동체의 활동을 차례로 소개했다.

운명의 5월27일, '계엄군의 광주시민 해산 시도'라고 밝힌 보훈청의 보고와는 달리 정 회장은 "신군부 세력은 시민의 바람과 노력과는 달리 무력진압을 자행했고,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해 들어오는 계엄군과 맞서 전남도청에 남아 끝까지 저항했던 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음을 당하거나 체포돼 끌려가야 했으며, 열흘 동안의 민주화운동은 그렇게 참혹하게 막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5월27일 새벽 도청에 남아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던 이들의 희생은 이 나라 민주화를 염원하는 모든 국민들의 의식 속에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고, 광주 학살을 통해 국가권력을 강점했던 신군부 세력에게는 학살의 원죄를 갖게 만들었다"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밖에 망월동 구묘역의 의미와 5월 정신이 199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 점,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점을 재확인한 뒤 "5·18은 반인륜적 학살자들의 단죄, 제도적 명예회복을 실현함으로써 지금도 세계 각처의 민주화와 인권운동, 과거청산의 수범이자 선험이 되고 있다"고 가치를 부여했다.

한 기념식 참석자는 "예전에는 경과보고가 5월 광주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었는데, 최근에는 그저 국가기념일의 하나로 다분히 형식적으로 흘러 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