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외부 적립 의무화, 운용 독립성 확보로 실질적인 노후 안전판 되길

2026-02-10     류효나 기자
▲ 박근종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

노(勞)·사(使)·정(政)이 2005년 12월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한 지 무려 20여 년 만에 모든 기업에 퇴직연금 가입을 의무화하고, 여러 기업의 퇴직연금을 묶어 운용하는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하기로 한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공동선언’을 지난 2월 6일 발표했다. 이번 합의의 핵심은 수익률 제고를 위한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과 모든 사업장의 퇴직급여 사외 적립 의무화다. 퇴직연금이 근로자의 노후 소득 보장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가입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수급권을 보호하기로 한 것은 바람직한 방향의 대수술이자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퇴직연금제도 개편에 중대한 분기점이 될 뿐만 아니라 노사정이 구조 개선을 위해 이뤄낸 첫 사회적 합의 도출이라는 의미도 크다.

이번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공동선언’은 고용노동부뿐만 아니라 양대 노총,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청년과 전문가 등이 선언에 참여했다. 가장 큰 의의는 전 사업장의 퇴직급여 사외 적립을 의무화한 데 있다. 퇴직연금은 노후 자산을 불리자는 취지로 2012년 이후 신설된 사업장에 의무화됐다. 하지만 형사처벌 규정이 없다 보니 가입률이 4곳 중 1곳꼴에 불과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퇴직연금 도입 사업장은 43만 5,000개로 퇴직연금 제도 도입률은 26.5%에 그친다. 300인 이상 대기업 도입률은 92.1%에 달하지만, 중소·영세 업체 도입이 저조한 탓이다. 5인 미만 영세 사업장 도입률은 겨우 10.6%에 불과하다. 영세·중소기업의 퇴직금 체불(滯拂)도 끊이지 않았다. 이번 조처로 퇴직급여 체불을 예방하고 회사가 망해도 퇴직금 수령을 보장받는 길이 열리게 됐다. 참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반기고 환영한다.

퇴직연금의 낮은 수익률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가입률이 높은 사업장이어도 중도해지가 많고, 55세 이후 정상 수령의 경우일지라도 일시금 비율이 압도적이다. 퇴직연금을 한 번에 수령해 주택 부채를 상환하거나 자녀 결혼 비용으로 주로 쓴다. 수익률은 쥐꼬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2025년 적립금 규모가 490조 원에 육박하고 있지만, 퇴직연금제도 도입 후 연평균 수익률은 고작 2.07%에 불과하다. 노후를 맡기기에는 어림도 없다. 최근 5년간(2020~2024년) 평균 수익률은 2.86%로, 국민연금 수익률(8.13%)에 크게(5.27%포인트) 못 미친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마이너스(-)에 가깝다. ‘기금형 퇴직연금’을 확대하기로 합의한 것도 퇴직연금이 노후 안전판으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기금형 연금은 크게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으로 나뉜다. 일단 기금형은 수익률 제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DC형에만 도입한다. 이렇게 되면 금융회사가 경쟁적으로 상품을 출시해 수익률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국민의 노후 안전판으로서 기금화를 통한 수익률 제고의 필요성이 제기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쟁점은 천문학적 규모로 커진 퇴직연금을 누구에게 맡기고 어떻게 운용할지에 달렸다. 이에 노·사·정은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 │ 기금 절반 이상을 국내외 주식으로 운용) ’, 영국의 ‘마스터 트러스트(Master Trust │ 신탁 기반 DC형 퇴직연금 제도)’ 등 연금 선진국에서 많이 활용하는 ‘기금형 연금’을 도입하기로 했다. 가입자가 금융기관과 직접 계약을 맺고 스스로 상품을 선택하는 ‘계약형 연금’과 달리 투자전문가로 구성된 별도의 수탁법인이 적립금을 관리·운용하는 방식이다. 개인이 운용하는 것보다 규모를 키울 수 있고, 그만큼 수익률을 높일 기회도 커진다. 국민연금에 맡기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운용 주체는 민간 금융사로 한정했다. 국민연금이 수탁법인이 되면 퇴직금이 환율 방어 등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소지가 있는 데다 노후 자산을 국가가 독점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노·사·정은 300인 이하 사업장엔 국민연금의 수탁자 참여 가능성을 열어 놓았는데, 가입자의 이익만을 위한다는 운용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퇴직금을 매달 외부에 납부할 때 커질 영세·중소기업의 부담은 정부가 재정 지원 방안을 마련해 시행 시기를 확정해야 한다. 의무화해 놓고, 구체적·실효적인 부담 완화 방안이 없으면 제도 안착이 지체되고 자칫 선언에 그칠 수 있다. 국내에도 ‘기금형 연금’의 사례가 있다. 근로복지공단의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의 지난해 수익률은 8.7%, 2022년 9월 이후 누적 수익률은 27.0%에 이른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퇴직연금이 노후 안전망이 되려면 갈 길이 멀다. 국회는 퇴직급여 보장법 등을 개정해 구체적인 운용·감독 주체 등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번 개편은 연금 개혁의 첫발이 돼야 마땅하다. 자영업자·특수고용노동자 등 연금 사각지대를 메우고자 하는 방안도 서둘러 마련해야만 할 것이다.

노·사·정이 퇴직연금 가입 사업장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전문가에게 운용을 맡겨 수익률을 높이겠다고 선언한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노·사·정의 합의는 아직 선언 수준이어서 구체화해야 할 부분이 많다. 투자 방식이나 퇴직금 수령 방법 등에서 근로자의 선택권은 최대한 보장해야만 한다. 국민연금이 기금 운용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 민간과의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고 주가 부양, 환율 방어에 동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서둘러 불식할 필요가 있다. 기금의 투자 판단으로 손실이 났을 경우 분쟁 가능성도 대비해야 한다. 특히 퇴직연금 제도 의무화로 인한 영세 사업장의 재정 부담을 해소하는 방안이 동시에 마련돼야만 할 것이다. 2012년 수탁자의 부실 운용으로 88만 명의 퇴직금을 날린 일본의 ‘AIJ 사태’ 같은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AIJ 투자자문사는 2000억엔 규모의 퇴직연금을 부실 운용하고 손실을 은폐해 88만 명의 퇴직금을 날렸다. 회사 밖에 적립금을 의무적으로 쌓게 되는 경우 영세·중소기업의 자금 부담이 커지는 부분도 마땅히 살펴야만 한다. 

무엇보다 퇴직연금 기금화 확대의 전제 조건으로 운용의 독립성 확보가 중요한 과제다. 퇴직연금을 선진국 수준으로 활성화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미 국민연금의 사례에서 연금에 정치적 영향력이 개입될 때 시장의 왜곡이 발생할 수 있음이 명확히 드러났다. 당연히 퇴직연금은 국민연금, 개인연금과 함께 3층 노후 보장의 핵심축(核心軸)이다. 안정성과 수익성을 두루 고려해 신중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근로자의 소중한 자산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기금의 투명한 지배구조와 내부통제, 정부의 관리·감독 등 제도적 안전장치를 제대로 마련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노·사·정 TF 선언문에 수탁자 책임의 원칙이 명시됐지만 기금 운용의 지배구조가 독립적이지 않다면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민간 전문가 중심의 독립된 기금 운용 체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인위적인 증시 투입이나 경영 간섭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관치의 입김을 차단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법제화돼야만 한다. 국민의 노후 자산은 정책용 쌈짓돈도, 경기 부양용 실험 자금도 아닌 만큼 운용 주체와 책임, 개입 금지 원칙을 법과 제도로 분명히 보장하지 않으면 불신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수익률 제고라는 장밋빛 전망에 취해 근로자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스민 자금을 훼손하는 치둔(癡鈍)의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각별 유념(留念)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금 운용의 원칙 준수에 달려 있다. “수탁법인이 오직 가입자의 이익만을 위해 기금을 운용해야 한다.”라는 ‘수탁자 책임의 원칙’이 이번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공동선언’에 담긴 점은 참으로 다행이다. 기금 운용을 맡을 수탁법인의 이사회 구성과 운영 과정에 정부와 정치권의 개입만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과거 국민연금 사례처럼 퇴직연금이 증시 부양과 환율 방어, 경영권 개입 수단으로 변질되는 일만은 결단코 없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퇴직연금이 다시 국가의 관리·통제 대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不息)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퇴직급여의 사외 적립 단계적 의무화에 따른 영세·중소기업의 부담도 가볍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기업과 달리 자금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 적립 의무는 당장 큰 경영 압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단계적 시행과 함께 실질적인 재정 지원 방안을 동시에 마련해야만 한다. 퇴직연금 개혁의 성패는 선언문 자체가 아니라 세밀한 제도 설계와 철저한 원칙 준수에 달렸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퇴직연금 개편의 성패는 수익률 숫자의 증감이 아니라, 국민이 자신 소유의 노후 자산을 여전히 ‘내 돈’으로 느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음을 각별 유념하고 근로자의 노후를 책임지는 중대한 개혁인 만큼 속도보다 완성도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촘촘하고 면밀하게 추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