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인종차별·혐오 조장 현수막 막는다
李 “저질스러운 현수막 달려도 정당이라 철거 못해” 행안부, 이달 내 지자체에 혐오 현수막 기준·사례 배포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국무회의에서 정당의 혐오 현수막을 문제 삼으면서 관련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이달 내로 혐오·차별 표현의 기준과 사례를 담은 지침을 마련해 지방자치단체에 배포한다는 방침이다.
16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행안부는 이달 안으로 정당 현수막에 인종차별 등 혐오 표현이 포함됐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사례를 정리해 각 지자체에 내려보낼 예정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어떤 문구가 인권 침해 우려가 있는 표현인지 지자체가 판단할 수 있도록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2년 개정된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정당 현수막은 일반 현수막과 달리, 지방자치단체에 신고를 하거나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고도 장소의 제약 없이 설치할 수 있다.
정치적 현안에 대한 정당의 입장을 나타내거나 정당의 정책을 홍보하는 현수막은 정당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자유롭게 설치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정당 이름을 걸고 게시된 현수막들 중에는 이런 취지와는 무관하게, 허위 사실을 담거나 특정 국가나 인종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문구를 담고 있어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극우 성향의 소수 원외정당인 내일로미래로당은 '중국인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 '중국인 무비자 입국은 관광이 아닌 점령?' 등과 같은 문구를 내건 현수막을 지속적으로 설치해 논란이 된 바 있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러한 혐오 현수막은 더욱 난립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11일 국무회의에서 "길바닥에 저질스럽고 수치스러운 내용의 현수막이 달려도 정당 현수막이어서 철거를 못 한다"며 대책을 주문한 바 있다.
윤호중 행안부 장관도 "정당 현수막이 옥외광고물법뿐 아니라 정당법에 의해 허용되고 있어, 법률 개정이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현수막 내용을 규제할 법적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옥외광고물법 제5조는 '인종차별적 또는 성차별적 내용으로 인권 침해의 우려가 있는' 광고물은 게시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무엇이 혐오·차별 표현으로 볼 것인지 기준이 모호해 지자체가 철거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행안부가 지자체 판단을 돕기 위해 구체적인 지침 마련에 나선 이유다.
국회에서도 정당 현수막을 규제하는 법안들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허위 사실로 특정인이나 단체의 명예를 훼손한 현수막은 철거할 수 있도록 하거나, 인권침해 문구가 포함된 현수막은 심의를 거쳐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의 옥외광고물법 개정안 등이 발의돼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당 현수막 내용을 규제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과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활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현수막 내용에 따라 정치적 현안에 대한 정당의 정당한 입장 표명인지, 단순 혐오나 비방인지를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안부도 이러한 논란을 의식해 혐오·차별적 표현의 기준을 마련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보고서 등을 참고해 혐오 표현 기준을 마련하되, 표현의 자유도 폭넓게 고려해야 해 쉽지 않은 작업"이라며 "일단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