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정보평등 '도우미' 점역·교정사, 일자리 '태부족'…대책 시급
"다양한 점자 만들고 싶어져"… 점역·교정사 도전 외국어 점자 체계도 나라마다 달라 학습 까다로워 점역·교정사 일자리 부족…"취업 기관도 적어 고민"
"중도실명한 후로 점자를 하루 한 시간씩 1년 동안 읽었어요. 그러다보니 점점 읽히더라고요. 국어 점자 자격증은 작년 전반기에 땄고 어느덧 영어도 공부하고 있죠."
지난달 28일 오전 9시께 서울 관악구 실로암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만난 주영실(51)씨는 점자 공부 과정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제99주년 한글 점자의 날(11월 4일)'을 일주일 앞둔 이날 주씨는 박진웅(25)씨와 함께 점자 도서가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채움 교실에 모였다. 김한 점자 교정사 직업훈련 강사(37)가 지도하는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교육을 담당한 김 강사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비시각장애인이던 시절 전공이었던 중국어 능력을 살려 중국어 전문 점역·교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교육생에게 설명을 할 땐 눈을 뜬 채로 말을 이어갔지만, 점자정보단말기의 점자 자판을 읽을 땐 지그시 눈을 감고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김 강사는 "박진웅 님 교재에 있는 다음 내용 읽어주세요"라며 박씨를 호명했다. 박씨는 자신의 점자정보단말기 자판 속 버튼을 꾹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 자판 위에 오돌토돌한 점자들이 솟아올랐다. 그는 손가락으로 점자를 빠르게 훑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표의 셀 내용 또한 열에 대응하는 대로 적는다."
이날 교육생들이 배우는 것은 표를 점자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행과 열로 이루어진 컴퓨터 도식 표도 점자로 번역해 시각장애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지침도 포함돼 있었다. 낯선 내용에 교육생들이 몸을 뒤척이자 김 강사는 "여러분들 이번에 영어 배우실 때 170개 약자 외우신 거 기억나죠? 표도 머리로 그리고 상상하면서 외워보세요. 나중에 일본어 점자 배울 때도 수월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점역·교정사는 묵자(비시각장애인의 언어)를 점자로 번역하고 오류를 교정하는 직업이다. 묵자를 점자로 번역하는 이를 점역사, 점역된 글자가 점자 규정에 맞는지 오류를 잡아내는 이를 교정사라 한다. 점역사는 주로 비시각장애인 자격증 소지자가, 교정사는 대개 시각장애인 자격증 소지자가 담당한다.
이들은 장애인들에게 지식 정보를 제공하며 우리 사회의 정보평등에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도서관 등 점자 유관 기관들이 최근 줄어들면서 이들의 일자리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가 이들의 취업과 관련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점역·교정사가 장애인 정보평등 등 기여
영어, 국어 등 일부 영역은 컴퓨터 자동화를 통한 점자 번역도 가능해진 상황에서도 점역·교정사는 여전히 필요하다.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정교한 작업과 교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씨는 "국어 점자 번역 업무를 맡았을 때 컴퓨터로 점역한 파일인데도 틀린 부분을 발견한 적이 있다"며 "직접 사람이 손으로 교정을 보는 작업과 교정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직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체감했다"고 설명했다.
이길원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점역팀장(41)은 "음성만으로 수학, 외국어 등 다양한 영역을 깊이 있게 학습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점자만이 시각장애인이 유일하게 보고 쓸 수 있는 문자인데 이러한 점자도서들이 제작되지 않으면 시각장애인들의 문해력 향상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중국어, 일본어, 수학, 과학 등은 점역사와 교정사들이 일일이 점자를 손으로 종이에 누르고 교정하며 점자도서를 만들기에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역·교정사의 손길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점역·교정사들은 우리사회의 정보 평등에도 기여하고 있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만약 점역·교정사 직업이 사라지면 시각장애인은 정보의 벽 앞에 놓일 수 있다"며 "시험지 한 줄, 약품 설명서 한장, 안내문 하나의 점자 오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삶의 기회를 빼앗는 장벽이 될 수 있어 점역·교정사는 사회의 정보 평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라고 강조했다.
◆전문 점역·교정사들, 갈 곳은 '태부족'
하지만 전문 점역·교정사들도 활동할 일자리가 많지 않다. 전문 점역·교정사들이 취업할 점자 유관 기관들도 최근 줄어드는 추세다. 정부가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장애인의 지식 정보 확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립장애인도서관에 따르면 2024년 전국 장애인도서관은 31곳으로 집계돼 9년 전 대비 13곳 감소했다. 다양한 점자 도서를 다루는 기관이 사라지면 점역·교정사 일자리도 줄어든다. 이 팀장은 "교정사가 취업할 기관 자체는 많지 않다"며 "1·2급 전문 점역교정사 수도 적어 채용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에 대응해 지난 2월 '점자법 시행령' 및 '점자법 시행규칙'을 시행했다. 점자법 개정안 주요 내용은 점자교육 전문인력양성, 점자교육원 지정·지원, 점자능력 향상평가를 위한 점자능력 검정 시행 등이 골자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은 지난 10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점자 활성화 교육기관으로 선정됐다. 이 팀장은 "3년 간 시각장애인들이 더욱 다양한 점자를 교육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박씨와 주씨는 지난 18일 영어 과목의 점역·교정사 2급 시험을 치른 뒤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박씨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내 직원들처럼 1급 자격증까지 취득해 전문 점역·교정사로 취업하는 게 목표다. 그는 "음악이나 일본어 과목 시험을 쳐 점역교정을 끝까지 공부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주씨도 "전문적인 교정사보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면서도 "초보자에게 한글 점자를 쉽게 가르치는 업무는 쭉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촉지 훈련만 1년 이상 노력해야…점역·교정사, 외국어 점자 숙지 오랜 시간 걸려
점역·교정사는 촉지 훈련에만 1년 이상 노력해야 하고 특히 외국어 점자를 배우는데도 오랜 시간이 투자해야 하는 등 난관을 뚫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직업이다.
외국어 점자 체계는 국어 점자 체계와도 다르게 운용돼 학습하기 매우 까다롭다. 전 세계는 여섯 개의 점으로 구성된 점자 틀을 공용 채택하고 있지만 나라 언어별 점자 규정은 따로 있다. 이 팀장은 "다양한 국가의 점자 표기 규칙도 제각각이라 모두 외워야 한다"며 "전문 교정사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좋아하는 성향이어야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점역·교정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외국어를 점자로 익히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각장애인 박씨는 처음 영어 점자를 배운 경험을 회상하며 "알파벳의 생김새는 몰라도 영어 점자가 숫자 점자와 비슷하다고 느꼈다"며 "a는 1과 c는 3과 비슷하다고 연상하며 공부했다"고 자신만의 암기법을 전했다.
5년 전 중도실명으로 후천적 시각장애인이 된 주씨도 "그냥 영어를 익히는 것과 영어 점자를 익히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며 "아는 단어여도 점자로는 철자를 천천히 읽으니 하나의 단어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잘 익히기 위해서는 초기에 점자를 접할 때 촉지 훈련을 이어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찍힌 점의 개수와 위치 및 모양을 정확히 파악해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팀장은 "처음 점자를 배울 땐 촉지 훈련도 6개월 정도 지속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다"며 "특히 대부분의 고령 중도실명자들은 손 감각이 떨어져 촉지 자체도 어려워 해 1년 정도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