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요동·3,500억 달러 선불, 상업적 합리성·통화스와프·비자 선결 조건

2025-09-29     류효나 기자
▲ 박근종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

한국과 미국이 관세 후속 협상에서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난항인 가운데 미국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행정부의 도를 넘는 한국 압박이 최고조에 이르러 관세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직후 정부는 “합의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된 회담”이라고 평가했지만, 이제 한·미는 3,500억 달러(약 494조 원)의 대미(對美) 투자를 놓고 동맹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파열음을 크게 내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 불안감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24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스콧 베선트(Scott Bessent)’ 미국 재무장관을 만나 “한국은 경제 규모와 외환시장의 측면에서 일본과는 크게 다른 점을 고려해 협상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펀드가 국내 외환시장에 미칠 충격을 줄이기 위해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미 투자 패키지는 ‘상업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양국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논의되길 기대한다.”라는 입장도 밝혔다고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전했다. 이와 별도로 김민석 국무총리는 이날 공개된 블룸버그(Bloomberg) 인터뷰에서 “(대미 투자 프로젝트는)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진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25일(현지 시각) “한국이 미국에 투자할 3,500억 달러는 선불(Up front)”이라고 못을 박으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반면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미국이 7·31 합의 때와 다른 말을 하고 있다.”라며 “무제한 통화스와프는 필요조건”이라고 강조했다. 협상 파열음이 커지는 형국이다. 외환시장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원·달러 환율은 두 달 만에 심리적 저항선인 1,400원을 뚫고 지난 9월 26일 오후 3시 30분 종가 기준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일 대비 11.8원(0.84%) 상승한 1,412.4원을 기록했다. 장중에는 1,414.0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는 각각 5월 14일(종가 기준 1,420.2원, 장중 기준 1,421.3원) 이후 최고치다. 문제는 글로벌 달러 약세에도 유독 원화만 약세를 보인다는 점이 문제다. 지난 5월 환율이 1,400원대였을 때 달러 인덱스는 102였지만 지금은 98.46까지 내려왔다. 미국과 관세 협상에 대한 불안감은 금융시장도 덮쳐 주가도 급락했다. 코스피는 85.06포인트(2.45%) 폭락한 3,386.05를, 코스닥은 17.29포인트(2.03%) 급락한 835.19를 기록했다. 이는 각각 세제개편안 충격이 있었던 지난 8월 1일(코스피 126.03포인트·3.88% 하락, 코스닥 32.45포인트 하락) 이후 최대 낙폭이다.

주요 통화들이 달러 대비 4% 이상 강세를 보이는 동안 원화만 반대로 움직였다. 외환시장에 대미 투자 공포가 선(先)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협상이 결렬되면 한국은 일본·유럽보다 불리한 25% 고율 관세를 적용받는다. 이렇게 되면 수출기업뿐 아니라 우리 경제 전반에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경제 체온계인 환율도 당연히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3,500억 달러를 현찰로 미국에 넘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금 조달 과정에서 달러 수요가 급증하고, 투자 과정에서 달러가 급속히 빠져나가며 원화 가치가 폭락할 수밖에 없다. 한국투자증권은 3,500억 달러가 2년간 집중적으로 유출하면 환율이 1,579원까지, 4년에 걸쳐 빠져나가도 1,536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을 해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다음 달부터 미국 내 공장을 짓지 않는 기업의 의약품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 것도 또 다른 악재다.

작금의 상황이 이런 만큼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과 ‘상업적 합리성’그리고‘비자 해결’은 대미 투자의 3대 선결 조건이다. 결코 무리한 주장이 아니라 상식적이고 합당한 요구다. 대미 투자 3,500억 달러는 한국의 ‘외환 보유액’ 4,100억 달러의 84%에 달하는 큰 규모로,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수준이다. 한국의 ‘외환 보유액’은 일본의 3분의 1에 못 미치고 미국 ‘국채 보유액’도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일본은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스와프라는 안전장치가 있어 대미 투자액 5,500억 달러를 감당할 여력이 있다. “미국 요구대로 하다가 외환위기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는 이 대통령 언급은 엄살이 아니다. 투자 이익 배분도 원금 회수 전까지 미국과 5 대 5로 하고, 이후 1 대 9로 나누는 ‘일본식 조건’을 따를 처지가 못 된다. 노동자 불법 감금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안전한 체류 조건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도 지극히 상식적이다.

미국 정부가 일본에 이어 이날 유럽산 자동차·자동차부품 관세율을 15%로 확정했다. 한국의 경쟁국들이 속속 관세 문제를 매듭짓는 상황이 조바심을 키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대미 투자에 관한 미국의 요구를 섣불리 수용할 수는 없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21일(현지 시각) 로이터와의 인터뷰를 통해 "통화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 그대로 3,500억 달러를 인출하여 전액 현금으로 미국에 대해 투자를 한다면 “한국은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교착 국면으로 치닫는 가운데, 미국이 한국에 투자액을 더 늘리라고 했다는 외신 보도까지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상대국의 형편을 헤아릴 줄 모르는 미국 태도다. 한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에 난색을 보이는 미국이 아르헨티나에 통화스와프를 먼저 제안한 것도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종잡을 수 없는 요령부득(要領不得)이라 할 수 있다. 협상의 결말이 어떻든 환율이 요동칠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렇다고 반미(反美) 정서에 기대어 문제를 풀 수는 더더욱 없다. 협상이 결렬되는 경우 어느 쪽이 더 큰 타격을 입을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미국은 무역확장법(Trade Expansion Act)에 따른 품목별 관세,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감축 등의 카드를 쥐고 있다. 25% 관세가 유지되면 한국 기업의 피해는 막대하다. 그렇다고 국익에 치명적인 합의를 수용할 수도 없다. 스콧 베선트 장관은 조선 분야에서 한·미 협력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재명 대통령의 말씀을 충분히 경청했고 내부적으로도 충분히 논의하겠다.”라고 했다. 한국과의 협력을 통한 ‘제조업 부활’을 미국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한국이 제시한 3대 투자 조건을 조속히 수용해야 한다.

지금의 관세 협상이 한·미 관계의 전부는 아니다. 미국이 최소 수십 년은 지속될 중국과의 전략경쟁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한국·일본 등 동맹의 협조가 의당 필수적이다. 제조업 르네상스를 주창하는 미국이 투자를 희망하는 산업은 반도체, 조선, 원전, 사회간접자본(SOC) 등이다. 한·일 외엔 대안이 없는 게 현실이다. 미·중 간 연간 군함 건조 능력이 약 200배 차이(미 해군 정보국 분석) 난다는 조선업이 대표적 사례다. 한미동맹의 큰 틀 속에서 ‘상업적 합리성’을 관철할 수 있도록 치밀한 협상력이 필요하다. 한국으로서는 통화 스와프 확보와 관세 인하가 절실하다. 협상 장기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만은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방한이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중대 분수령이다. 관세 협상은 외교·안보 현안과도 맞닿아 있다. 미·중 정상까지 참석하는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소외되지 않으려면, 차분하면서도 치밀하고 세심한 대비가 필요하다. 진정한 거래의 기술’을 이제부터 발휘해야만 한다. 급하다고 해서 자칫 국익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에 덥석 합의해서는 결단코 안 될 것이다. 정부는 확고한 의지와 원칙을 가지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 무제한 통화 스와프는 필수 중의 필수임을 각별 유념하고 반드시 관철할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을 총력 경주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