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월한 대만의 친기업 환경과 재정 건전성, 타산지석으로 배워야
올해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2년 만에 대만에 추월을 당할 것으로 예측되면서 무너진 '경제 성장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9월 14일 우리 정부와 대만 통계청 등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 7,430달러로, 대만의 3만 8,066달러에 못 미칠 것이라 예상된다. 한국 정부가 지난 8월 22일 제시한 올해 명목 GDP 성장률 전망치와 대만 통계청이 지난 9월 10일 제시한 올해 1인당 GDP 전망치를 단순 비교한 수치다. 한국의 1인당 GDP는 올해 명목 GDP 전망치(1조 9,345억 달러)를 통계청 인구 추계 데이터상 올해 인구(5,169만 명)로 나누는 방식으로 추정했다. 올해 명목 GDP는 지난해 명목 GDP 1조 8,746억 달러에 정부가 발표한 올해 경상 성장률 전망치(3.2%)를 대입해 산출했다.
한국은 2003년 1만 5,211달러로 대만(1만 4,041달러)을 앞선 이후 22년 만에 경제력 순위가 역전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대만이 한국을 추월하게 된 주요 원인은 반도체 수출을 중심으로 한 대만의 고속 성장에 있다. 특히 글로벌 ‘파운드리(Foundry │ 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점유율 1위인 TSMC 등 대만 반도체 기업의 초격차 기술과 그에 따른 수출 경쟁력이 밑바탕이 됐다. 대만의 올 2분기 실질 GDP는 작년 동기 대비 8.01% 증가하면서 2021년 2분기(8.28%) 이후 최고 기록을 썼다. 이에 따라 대만 통계청은 지난 8월 15일 올해 실질 GDP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10%에서 4.45%로 대폭 상향 조정했고 내년 전망치로는 2.81%를 제시했다. 반면, 한국 경제는 올해 1분기에 역성장을 기록했고, 2분기에는 0.6% 성장하는 데 그쳤다. 정부는 올해와 내년 한국의 실질 GDP 성장률이 각각 0.9%, 1.8% 수준으로 대만을 한참 밑돈다. 글로벌 인공지능(AI) 시장이 확대되면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보유한 한국도 반도체 분야에서 호재를 맞았었지만, 내수 부진 장기화와 미국의 자동차·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에 따른 수출 타격 등으로 대만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올해 잠재성장률(1.9%)을 지속해서 하회(下廻)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올 상반기 국제통화기금(IMF)은 대만의 추월 시점을 내년으로 예상했지만, 대만이 고속 성장하는 반면 한국 경제는 부진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 시점이 한 해 당겨졌다. 이에 따라 선진국 기준선으로 여겨지는 1인당 GDP ‘4만 달러’의 꿈도 대만이 먼저 달성할 가능성이 커졌다. 대만 통계청은 내년에 1인당 GDP가 4만 1,019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한국은 내년 1인당 GDP가 3만 8,947달러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최근 국회에 제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27년에 4만 달러를 달성 가능할 것으로 점쳤지만, IMF는 지난 4월 2029년에나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아시아 네 마리 용 가운데 한국은 싱가포르(9만689달러), 홍콩(5만4107달러), 대만에 이어 꼴찌로 밀려났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대만의 성장세다. 미국이 20%의 고율 관세를 매겼음에도 올해 성장률 전망을 3.1%에서 4.45%로 올렸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를 등에 업고 지난달에만 수출이 34% 늘어났다. 한국의 0.9% 저성장과 대조를 이룬다.
기업들의 위상도 크게 갈렸다. 5년 전 비슷했던 삼성전자와 TSMC의 시가총액은 이제 446조 원 대(對) 1,500조 원으로 무려 3배를 넘게 벌어졌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TSMC가 경제를 이끄는 가운데 반도체 부품·장비·설계 등에서 여러 혁신 기업이 쏟아지면서 대만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생태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 혁신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인 것이다. 반면, 한국은 올해 2분기 실질 GDP가 전 분기 대비 0.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같은 분기 대비로는 0.6%로 대만과 차이가 더 두드러졌다. 한국은 하반기 들어 민간 소비를 중심으로 내수 경기가 모처럼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미국 트럼프 행정부 관세 인상에 따른 수출 둔화 우려 등 대외 불확실성이 확대된 상황이다.
통화 가치 흐름 역시도 엇갈렸다. 대만 달러는 10년 전 달러당 32.6에서 30.28로 강세를 보였지만, 원화는 같은 기간 1,190원에서 1,394원으로 오히려 약세다. 양국 통화가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였더라도 한국의 1인당 GDP는 4만 8,911달러에 달할 것이어서 아쉬움을 더한다. 기업 환경 차이는 더욱 극명하다. 대만의 법인세율은 20%로 한국의 24%보다 4%포인트나 낮다. 2009년 상속세를 50%에서 10%로 대폭 인하한 뒤 자취안지수는 5배 급등했다. 노사 관계도 안정적이다. 노조 조직률은 7%로 한국의 13%보다 낮은 상황이다. TSMC에는 노조가 없고, 신공정 도입 땐 고강도 업무와 함께 파격적 보상을 제공한다. 게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 재정 건전성은 더욱 선명해 보인다. 대만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12년 39.2%에서 2023년 29%로 무려 10.2%포인트나 낮아졌는데 반해 한국은 34.9%에서 49%로 외려 14.1%포인트나 치솟았다. 지난해 대만은 재정 흑자까지 기록하며 국제신용평가사 피치(Fitch)로부터 한국(AA-)보다 높은 AA(안정적)를 받았다. 반면, 피치는 지난 9월 12일 프랑스의 GDP 대비 114%에 달하는 국가 부채를 경고하며 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내렸다.
반도체 수출을 앞세운 대만의 고속 성장에 22년 만에 역전을 허용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상대적으로 뒤처진 이유에 대해선 찬찬히 반추하면서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 무엇인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노동, 세금 관련 규제가 기업이 성장하고 개인이 부자 되는 의욕을 꺾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만 한다. 그동안 긴축 요구를 거부하고 ‘포퓰리즘(Populism)’에 기댄 대가란 게 중론이다. 대만의 길을 따를 것인지, 프랑스같이 포퓰리즘의 덫에 걸려들 것인지 기로(岐路)에 섰다는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고 대만의 고속 성장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와 안보 환경 등이 비슷한 대만의 국민소득이 한국을 추월할 수 있는 것은 4차 산업혁명의 꽃인 인공지능(AI) 붐을 적시에 포착(捕捉)하고 제대로 올라탔기 때문이다. 간판 기업인 TSMC는 ‘엔비디아(NVIDIA)’ 등 주요 빅테크(Big tech)의 AI 칩(Chip)을 생산하며 세계 파운드리 시장 70%를 점유하고 있다. TSMC 외에도 반도체 부품·장비·설계 등에서 다수의 혁신 기업이 쏟아져 AI 생태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위해 대만 정부는 필요한 정책적 지원을 결단코 아끼지 않았다. 2021년 봉착한 큰 가뭄 때에도 농업용수를 끌어다 TSMC 공장에 우선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계가 인력 부족을 호소하자 대학에 6개월마다 반도체 전공 신입생을 뽑도록 했을 정도로 총력 지원을 했다.
이와 달리 한국은 11년째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벽에 갇힌 데다 0%대 저성장이 고착화하고 있다. 한국의 10대 수출 품목 중 8개 품목이 20년째 그대로일 정도로 새로운 산업을 찾지도 못하고 키우지도 못한 탓이 크다. 4%를 훌쩍 넘기는 올해 대만 성장률 전망치만 보더라도 0%대 저성장에 허우적거리는 우리와 격차는 갈수록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기적 안목에서 성장 동력을 되살릴 전반적 구조개혁에 공을 들여야 한다. 철강 조선 자동차 등 전통 주력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시키고 미래 신산업을 육성하는 한편 사양산업에 쏠린 자원은 재분배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AI 3대 강국 도약을 선언했지만, 경제 체질을 바꿀 구조개혁이나 기업 활성화 전략은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더한다. 혁신 역량을 지닌 기업이 끊임없이 배출돼 AI 대전환을 이끌 수 있도록 기업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기업 환경부터 조성해야만 한다.
특히, 저성장이 고착화하는 암초를 제거하기 위해선 급감하는 생산가능 인구를 적기에 적소에 효율적으로 투입해 최대 효율을 거둘 수 있도록 노동, 교육, 연금 구조개혁에도 박차를 가해야 할 때다.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확장 재정을 통해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자신한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기업이 주도하는 동반성장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역대급의 확장 재정을 앞세우며 ‘돈 풀기 수렁’으로 향하는 우리로서는 프랑스의 몰락을 반면교사(半面敎師)로 삼아야만 한다. 다행히 우리는 반도체 외에 자동차, 조선, 방산, 원전 등 이미 잘 구축된 산업 포트폴리오(portfolio)를 살려내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문제는 뚜렷한 노쇠화에다 반도체, 배터리 분야가 중국에 따라잡혔고 철강, 석유화학은 중국발 위협에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으며, AI, 로봇, 바이오헬스 등 미래 산업 격차도 점점 벌어지는 상황이다. 세제·인프라 지원, 개방형 혁신 네트워크 구축 등 대만의 성공전략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활용한 산업 포트폴리오 재편도 긴요하다. 경제 체질 개선과 성장 동력을 되살릴 혁신은 물론 민·관·정의 협력 강화도 급선무임을 각별 유념하고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