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 전공의 "복귀하자" 급물살…박단 사퇴 이후 '새판' 짠 전공의들
새 비대위 구성…사태 해결 변곡점 기대 여러 요구사항 정부가 수용할진 미지수
의대 증원 등을 두고 1년 5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의정 갈등 국면에서 사직 전공의들을 대표해 온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이 사퇴했다. 의료계에선 사직 전공의와 의대생 복귀 등 사태 해결의 새 국면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의료개혁 재검토 등 전공의들이 제시한 여러 복귀 조건들을 정부가 수용할진 미지수여서 합의점을 찾기까진 난항이 예상된다.
29일 의료계에 따르면 박 비대위원장은 지난 24일 대전협 내부 대의원방을 통해 “모든 직을 내려놓고자 한다”며 “지난 1년 반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했으나 실망만 안겼다. 모든 것이 내 불찰”이라고 공지했다. 또 "모쪼록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며 "학생들을 끝까지 잘 챙겨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박 비대위원장이 사퇴를 결심한 배경으로는 전공의들 사이에서 박 비대위원장의 대표성에 의문이 커진 데다 자신의 강경 투쟁 기조에 반하는 전공의들의 조건부 복귀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공의 대표직을 유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 비대위원장은 2023년 8월 대전협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지난해 2월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발표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된 대전협 비대위원장을 맡아왔다.
지난해 4월 윤석열 전 대통령과 면담 후 페이스북을 통해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없습니다’는 글을 남겨 정부와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음을 암시했다. 올해 3월에는 페이스북에 "팔 한 짝 내놓을 각오도 없이 뭘 하겠다는 것이냐"면서 의대생들에게 등록 없이 휴학을 이어가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그러나 의정 갈등 장기화 속에서 의료계에선 박 비대위원장이 전공의들의 다양한 의견을 대변하지 못하고 대안 없는 투쟁만을 일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최근에는 일부 사직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이 설문 조사 등을 통해 9월 복귀 의향을 밝힌 데 이어 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세브란스병원 등 '빅5' 병원 전공의 대표들도 공개적으로 조건부 복귀 의사를 밝혔다.
박 비대위원장 사퇴 직후 서울아산병원·세브란스병원·고려대의료원·서울대병원 등 4개 수련병원 전공의 대표는 지난 24일 내부 공지를 통해 "현재 비대위 체제로는 조속한 시일 내 의미 있는 변화를 마련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돼 새로운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이 시급하다"며 대전협 임시 대의원 총회 개최를 알렸다. 이들은 지난 26일과 전날 두 차례 개최한 대전협 임시 대의원 총회에서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를 새 비대위원장으로 선출해 추인했다.
앞서 박 전 비대위원장(의협 전 부회장)과 함께 대한의사협회(의협)집행부에서 활동해온 김민수 정책이사, 김유영·박명준 기획이사, 이혜주 국제이사 등 전 전공의 임원 5명도 사퇴했다.
박 비대위원장 사퇴를 계기로 비대위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사직 전공의와 의대생 복귀 등 의료 사태 해결의 변곡점이 마련될 것인지 주목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A 전공의는 "복귀를 원하는 전공의들이 많았지만 일부 강경파의 목소리에 묻혀왔다"면서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대전협이)내부 소통이나 정부와의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에 소극적이어서 불만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이 의료 정상화의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내달 말 하반기 전공의 모집이 시작된다.
또 다른 대학병원 B 전공의는 "적어도 (전공의들이) 정부와의 대화 테이블에 나오기는 할 것 같다"면서 "이전보다 (사태 해결에 대한)활발히 논의가 이뤄질 것 같긴 하다"고 내다봤다.
한 비대위원장은 대정부 협상력을 높이고 소통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7일 서울 모처에서 박주민 국회 보건복지위원장과 만나 1년 5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의정갈등 해소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양측은 향후 지속적으로 만나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앞서 그는 박 전 비대위원장 사퇴로 이어진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박 전 비대위원장이 소통이 부족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새 비대위의 대정부 요구안의 큰 골격은 ▲윤석열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의료개혁 실행방안 재검토 ▲열악한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과 수련 연속성 보장 ▲보건의료 거버넌스 의사 비율 확대와 제도화다. 9월 전공의 복귀를 추진하면서 매년 2월 시행되는 전문의 시험을 8월에도 시행하는 등 수련특례를 요구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그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금 더 이상의 파행을 막고 대한민국의 무너진 의료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적기"라면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협상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반면 일각에선 전공의들이 내부 갈등을 봉합하지 못해 결속력이 약화되면서 의정 협상이 흐지부지 되고 일부만 수련병원으로 복귀하는 어정쩡한 봉합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다.
서울의 주요 대학병원 C 전공의는 "'왜 독단적으로 복귀 의사를 밝혔냐'며 4개 대형병원 전공의 대표를 비판하는 다른 병원 대표들이 나오면서 이미 내홍을 겪고 있다"면서 "복귀 길이 열리면 복귀할 수 있는 사람만 복귀하면서 끝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내각 인선 후 의정 협상 테이블이 차려져도 전공의들의 제시한 요구사항들이 적지 않고 의료 환경도 사태 전과 달라져 정부와 합의점을 찾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최근 전공의 200여명이 모여있는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선 ▲올해 9월 모집 시점에 기존 정원과 별도로 복귀 근무 허용 ▲향후 수 년간 전문의 자격시험 2월 뿐 아니라 8월에도 시행 ▲향후 수 년간 전공의 3월 뿐 아니라 9월에도 모집 ▲전공의 군입대 3월 뿐 아니라 9월에도 허용 등이 복귀 조건으로 제시됐다. 정부가 의정 갈등 장기화에 따른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료보조(PA) 간호사를 중심으로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을 추진하면서 전공의들은 설 자리를 상당 부분 잃었다.
사태 해결 방안을 빠르게 도출해 의료를 정상화하려면 의료계 요구안 우선순위 설정, 의사를 대변하는 유일한 법정단체인 의협의 적극적인 대응을 통해 대정부 협상력을 높이고 정부와 국민 설득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안나 대한의료정책학교 교장(의협 전 대변인)은 "의협(대한의사협회)이 사태 해결 의지를 보여야 의정 갈등 해소에 속도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수련병원 교수 "의정 갈등 속에서 당사자들인 전공의들이 사태 해결을 위한 치열한 논의와 고민이 부족했다"면서 "이젠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