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자제 강조하며 ‘헌법을 존중하라’는 퇴임 재판관 당부 새겨들어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지난 4월 18일 2019년 4월 19일부터 2025년 4월 18일까지 6년의 임기를 마치고 나란히 퇴임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헌정사에 격동의 시기를 헤쳐온 두 재판관 재임 말기는 12·3 내란으로 헌정질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유린당한 국난의 시기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결정,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2명 지명 효력 정지 결정을 끝으로 법복을 벗은 두 헌법재판관의 소회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 두 중요 사건을 8대 0 전원일치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뒤여서 한결 홀가분했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이종석 전임 헌재소장이 퇴임한 뒤 2024년 10월 18일부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맡아 헌재를 이끌어온 문 대행은 이날 헌법재판소(헌재) 대강당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해 행한 퇴임사에서 “헌법재판소가 헌법이 부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실성과 타당성을 갖춘 결정을 해야된다”라 생각한다며, “첫째, 재판관 구성이 다양화돼야 한다. 둘째,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하다. 셋째, 결정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헌재 결정에 대한 학술적 비판은 당연히 허용되어야겠지만, ‘대인논증’ 같은 비난은 지양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대인논증(對人論證)’이란 논리를 따지지 않고 인격이나 경력, 사상 등을 지적하면서 범하는 오류를 뜻하는데 헌재 결정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것으로 문 대행을 비롯한 재판관들의 이념과 성향에 대한 악의적인 공세를 콕 집어 문제 삼은 것이다. 일각에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명한 문 대행이 우리법연구회장을 역임하는 등 진보 성향이라는 점을 들어 편향적 결정을 한다는 공세를 펴왔었다.
특히 문 대행은 “정치 문제는 정치로 풀어야 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고 고뇌(苦惱)로 얼룩진 격정(激情)의 30여 성상(星霜)의 법관 생활을 마무리했다.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을 이끌었던 헌재소장 권한대행으로서 정치의 사법화, 이로 인한 사법 불신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 셈이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법복을 벗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가슴에 숨겨둔 절규가 아닐는지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의 말처럼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실종된 지 오래고 6·3 대선 이후에도 정치 복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작금의 현실로 목도(目睹)되고 있어서 일게 선명(鮮明)하다. 그렇다고 정치적 갈등과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매번 헌재에 심판을 청구한다면 민주주의는 왜곡되고 사법 만능 시대를 부를 것이 너무도 자명(自明)하다. 정치권은 6·3 대선을 계기로 정치 복원에 나서야만 한다.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소임은 헌재가 아닌 정치의 몫임을 우리는 이미 학습했고 역사적 경험으로 감득(感得)했다. 이에 앞서 문 대행은 지난 4월 17일 인하대 특강에선 ‘분열과 혼란을 겪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관용과 자제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관용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고, 자제는 힘 있는 사람이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특히 “야당에 적용되는 권리가 여당에도 적용돼야 하고 여당에 인정되는 절제가 야당에도 인정돼야 그것이 통합”이라며 정치권 모두를 향해 쓴소리로 일갈(一喝)했다.
역시 진보 성향으로 분류돼온 이미선 재판관도 이날 퇴임사에서 “매 사건 저울의 균형추를 제대로 맞추고 있는지 고민했다”라며 일각의 이념 공세를 에둘러 반박했다. 그는 특히 “국가기관의 헌법 준수는 국민의 명령이자 자유민주국가 존립 전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기관이 헌법을 준수하지 않고 무시할 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국가기관이 헌법을 준수하지 않고 무시할 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헌법의 규범령(規範令)이 훼손되지 않도록 헌재가 해왔던 것처럼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헌법 질서의 수호·유지에 전력을 다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두 전 재판관의 퇴임사에서 문형배 재판관은 소명의식이 강했으며, 이미선 재판관은 직업의식이 강한 면을 보여 주었다는 후평(後評)이다.
헌재는 지난 4월 9일 마은혁 재판관이 임명되면서 ‘9인 완전체’가 된 지 불과 10일 만에 두 재판관의 퇴임으로 당분간 ‘7인 체제’로 운영된다. 7인으로 사건 심리와 결정은 가능하지만 9인 체제와는 다르다. 위헌과 탄핵 심판의 정족수가 6명이기 때문이다. 만일 재판관 의견이 4대 3이나 5대 2로 갈리면 두 명이 모두 채워졌을 때 결과와는 크게 달라질 수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국가 중대사를 판단하는 헌재 재판관이 정원을 못 채운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17일 국회 선출 몫으로 임명된 이종석 헌재소장, 김기영·이영진 재판관 세 재판관이 퇴임하면서 후임이 임명되지 않아 헌재 기능이 마비될 뻔했다. 세 재판관 퇴임 전 7인 이상 출석해 사건을 심리한다는 '헌법재판소법'의 효력을 스스로 정지하는 고육지책(苦肉之策)까지 냈다. 헌재소장 역시 6개월 동안 공석으로, 문 대행이 맡아오다 이번에 문 대행이 퇴임하면서 김형두 재판관이 대행을 맡았다. 재판관 임명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는 이유는 공직자 탄핵 심판과 권한쟁의 심판이 빈발해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과거엔 상식과 관례로 이뤄졌는데, 작금에 이르러서는 헌법과 법률 문구 하나하나까지 극심히 따지기 시작하게 된 것으로 역설적이지만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다는 반갑지 않은 징후(徵候)이기도 해 씁쓸할 뿐이다.
다만, 헌재가 본연의 역할을 보다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선 재판관 공석이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고 개선해야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헌법재판관 선출과 임명에 대하여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대통령 혹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너무 정치적으로 임명권을 행사하지 않도록 견제할 장치도 필요하다. 독일은 후임 재판관이 선출되지 않으면 헌재 전원합의체가 다수결로 후보를 추천해 의회에서 선출하는 ‘비상 추천제’를 두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홍기태 변호사(전 사법정책연구원장)의 법률신문 논단 기사에 의하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8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 부를 2개 두어, 헌법재판관이 총 16명이다. 상원(Bundesrat)과 하원(Bundestag)에서 8명씩 후보자를 선출하며, 대통령이 임명한다. 다수당의 일방적 독주를 방지하고 타협을 유도하기 위하여, 상원에서는 투표수의 2/3 찬성으로, 하원에서는 간접선거를 채택하여 원내교섭단체(의석 5% 이상)의 의석수에 비례한 위원으로 구성된‘재판관선출위원회(12인)’를 두고 위원회에서 2/3 찬성으로 선출하게 된다. 차제에 헌법재판관의 공석으로 인한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도 모색되어야만 한다. 독일에서는 후임 재판관이 임명될 때까지 기존 재판관이 업무를 계속하도록 함으로써, 업무의 공백과 헌법재판의 왜곡이 없도록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예비재판관을 둠으로써, 헌법재판관의 공백을 메우도록 한다. 특정 정치세력이 당리당략이나 당장의 유불리에 따라 제도를 바꾸지 말고, 폭넓은 합의에 기초해 우리 실정에 맞는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우리 헌법은 헌법재판관의 인원, 구성 및 임기 등을 아예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어 법률로서 개선안을 마련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나, 새 정부 들어서 장기적 방안으로 눈여겨 살펴보고 적극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관 구성에도 더 다양화해야 한다. 검사와 변호사 출신이 간헐적으로 임명이 되기도 하지만 절대다수는 판사 출신이다.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쟁점을 검토하기 위해 재판관 구성의 다양화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한 문 대행의 제언을 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재판관 개개인이 노력한다 해도 정권마다 노골적으로 자기편을 심는 관행이 변하지 않으면 이념·정파 논란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또한, 헌법연구관이나 교수에게도 재판관이 되는 길을 터줘야 한다”라고 제언했다. 실재적으로 1987년 헌재 출범 이후 헌법연구관에서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된 사례가 전혀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경청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헌재의 숙고 기능을 제고시킴은 물론, 헌법재판 결과의 수용도를 높이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어서다. 최근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일부 세력의 법원 공격에 대하여 엄중한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이다. 당연한 조처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헌법기관의 구성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거나 이를 독단적인 권한으로 여기는 태도 또한 결단코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직접적인 폭력에 대하여는 치료하고 회복할 여지가 있겠지만, 자의적인 권한 행사에 대하여는 별반 대책이 없으니 어떻게 보면 더 교묘한 폭력이라 할 수 있을 터, 더욱 엄중하고 추상같이 단호하고 강력한 처벌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