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불확실성과 경제 심리 위축에 사라진 GDP 6조3010억원
한국은행이 올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두 달 전인 작년 11월 전망한 1.9%에서 1.6∼1.7%로 내려 잡았다. 지난해 4분기 경제성장률도 기존 전망치인 0.5%의 절반을 밑돌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은행이 다음 달 말로 예정된 공식 경제전망 발표를 앞두고 수정 전망치를 미리 공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행 조사국은 지난 1월 20일 블로그에 ‘1월 금융통화위원회 결정 시 한국은행 경기 평가’ 제하의 글을 올리고, 경제전망 수정치를 공개했다. 한국은행은 원래 매년 2월, 5월, 8월, 11월 등 연간 네 차례에 걸쳐 경제전망 수치를 발표한다. 다음 달인 2월 공식 전망치 발표를 앞두고 이례적으로 작년 11월에 발표한 전망 수정치를 이례적으로 한 달 앞당겨 서둘러 공개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춘 이유로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정치 불확실성과 경제 심리 위축’을 들었다. 계엄 여파로 지난해 연간 성장률도 2.2%가 아닌 2.0∼2.1%로 낮아질 것으로 봤다. 최근 JP모간((JPMorgan Chase & Co)이 올해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1.3%까지 낮추는 등 과도하게 부정적 시각이 형성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1월 발표한 전망치 1.9%에서 두 달 만에 0.2∼0.3%포인트나 낮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1%, 국제통화기금(IMF)의 2.0%, 기획재정부 1.8%보다 훨씬 낮은 전망치다. 글로벌 투자은행 8곳 평균치(1.7%)도 밑돌 수 있다. 보수적인 한국은행마저 정치 불확실성에 따른 경제 타격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와 올해 GDP 감소분을 모두 합하면 6조3010억원에 달한다. 중형차 20만 대 이상을 더 팔아야 메울 수 있는 규모라는 안팎의 평가다.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이 지금까지의 관행을 깨고 이례적으로 중간에 성장률 전망치를 내놓은 것은 정치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경제와 대외신인도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매우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최근에는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의 서울서부지방법원 난입 사태로 정치권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공식 출범으로 대외 불확실성까지 커지고 있어서다. 이날 블로그에도 ▲ 주력 수출산업에서의 글로벌 경쟁 심화 ▲ 미국 신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같은 대외 여건 역풍 ▲ 비상계엄 사태 이후 국내 정치 불확실성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 따른 심리 위축 등을 리스크 주요인으로 꼽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카드 사용액이 12월 초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9% 늘었다가, 12월(25~31일) 0.9% 감소했고, 올해(1월 1~12일) 0.8% 줄었다. 상대적으로 소비가 증가하는 연말 연초에 소비 심리가 확 꺾인 것이다. 건설투자도 12월 중 아파트 분양 실적이 당초 계획이었던 2만5000호보다 17.2% 감소한 2만1000호를 기록하며 4분기 부진도 심화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최근 탄핵 정국에서 ‘정치’ ‘불확실’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기사의 수로 산출한 ‘정치 불확실성 지수’는 12·3 비상계엄 직후 14포인트까지 올랐다. 과거 두 차례 탄핵 정국과 비교해 높게 나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시기 최고치였던 2004년 3월 7.8,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최고치였던 2016년 12월 7과 비교해, 윤석열 대통령 2차 탄핵안이 가결된 12월 중순이 13.8로 두 배에 가까웠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낮아졌다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소추로 다시 높아졌고, 윤 대통령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낮아졌다. 법적 시스템 작용이 중대한 변곡점이 된 것이다.
한편, 해외 발(發) 먹구름도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한국은행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경제정책도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미·중 통상 갈등 가능성을 감안하면 대미(對美)·대중(對中) 경제 외교를 강화해 타격을 최소화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경제 외교 라인이 사실상 공백 상태라는 지적이 나온 작금의 위기 상황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은 작년 4분기 말부터 경제에 본격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이 0.2%를 밑돌며 11월 말에 전망한 0.5%의 절반 이하로 쪼그라들었을 것으로 봤다. 지난달 수입 자동차 판매도 16.7% 감소했다. 연말 경제 주체들이 받은 심리적인 충격과 부진한 경기 상황이 올해에도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희망의 새해가 밝아 왔지만, 한국 경제는 잔뜩 흐려져 있는 형국이다. 지난 1월 21일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20일 수출액은 316억 달러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5.1%(17억1000만 달러) 감소했다. ‘관세폭탄’ 등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폭풍이 아직 본격화하지 않았는데도 수출이 주춤하고 있는 현실이다. 생산이 감소하고 소비가 위축되면서 경기 악순환이 우려되는 가운데 고환율과 고금리, 고유가 장벽은 여전히 경제계를 압박하고 있다. 특히 고환율에 국제유가 상승이 겹쳐 서울 시내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1800원을 넘어섰고, 생산자물가가 두 달 연속 오르며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고 서비스업과 제조업·광업 생산이 모두 줄고 소비와 연결되는 소매업 판매도 주춤하다.
한국은행의 수정 전망치는 정국 불안이 1분기까지만 이어지고 2분기부터 점차 해소될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예상보다 더 길어지면 경제 전반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한국은행이 지난 1월 16일 개최된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현행 3.0%로 동결했지만 2월에는 금리 인하가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금융정책만으론 역부족이다. 정치 불확실성을 줄이려면 법과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부터 실행으로 보여줘야만 한다. 중립적인 비상계엄 수사와 질서 있는 탄핵 심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반도체특별법 등 경제 살리기 입법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속히 통과시키고, 신성장 엔진을 재점화하고 경제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정국 안정에 협조해야 할 것은 물론 포퓰리즘 요소를 제거한 추가경정예산안 편성도 서둘 필요가 있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글로벌 지형의 새판 짜기가 시작된 지금, 정치적 불확실성이 길어질수록 우리 경제는 더 망가질 수밖에 없다. 이름뿐인 여(與)·야(野)·정(政) 협의체지만 정치권의 자제와 협조 없인 백약이 무효임을 명심하고 서둘러 본격적으로 가동해 위기 수습의 지혜와 힘을 모으기를 바란다. 더는 정치 혼란이 경제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정치권은 각별 유념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