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도의'버리고 '꼼수' 택한 박병엽 팬택 부회장
자신의 거취를 놓고 채권단을 압박한 팬택 박병엽 부회장의 행보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은 지난 6일 오후 3시 상암동 사옥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31일을 끝으로 회사를 떠나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박 부회장은 "너무 지쳐서 쉬고 싶다"고 밝혔지만 관련업계에서는 원활한 기업재무구조 개선작업(워크아웃) 졸업을 위해 채권단을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박 부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채권단은 백기를 들었다. 박 부회장의 경영 복귀를 조건으로 팬택을 올해 안에 워크아웃에서 졸업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결국 박 부회장은 '돌연 사퇴'라는 초강수를 통해 워크아웃 졸업이라는 실리를 챙긴 셈이다. 만일 그가 사퇴의사를 번복한다면 당초 포기하기로 했던 10%의 스톡옵션까지 챙기게 된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이러한 박 부회장의 '꼼수'에 대해 도덕적 해이, 즉 모럴해저드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팬택을 경영위기로 몰아가 투자자들에게 수천억원의 손실을 안긴 박 부회장이 지난 5년간 경영권을 보장해주고,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채권단을 압박해 회사와 자신의 실리를 챙겼다는 이유에서다.
◇ '실리(實利)'위해, '도의(道義)' 외면?
팬택계열은 2005년 하반기 이후 원화 강세의 지속과 휴대폰 산업의 경쟁 심화 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마케팅 비용 확대 등 국내외 투자를 강행했다.
그러나 경영환경의 악화로 투자회수가 지연됨에 따라 실적이 악화됐고, 금융권의 여신한도 축소 및 채권 회수 움직임이 일시에 겹치며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팬택이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팬택앤규리텔(2009년 팬택에 합병)과 팬택 두 회사는 상장폐지됨에 따라 당시 팬택계열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은 수천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봐야 했다.
실제로 2006년 10월 초 각각 5463억원, 3327억원에 달하던 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의 시가총액은 워크아웃 직전인 11월 21일에 2483억원, 1522억원으로 반토막이 났으며, 2007년 4월 감자와 상장폐지로 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의 주식은 휴지조각이나 다름 없는 상태가 됐다.
피해를 본 것은 투자자들 뿐만이 아니다. 팬택에 1조2000억원 이상의 자금을 대출해준 채권기관들 역시 팬택을 살리기 위해 약 6100억원에 달하는 채권을 출자전환해줬으며 약 5000억원의 대출금에 대해서는 채권 회수 대신 5년간 상환을 유예시켜줬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채권단은 자금난에 봉착한 팬택을 회생시키기 위해 박 부회장의 백의종군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실패한 경영자' 박병엽에게 다시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채권단이 박병엽 부회장에게 준 특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2009년 말에는 실적 개선에 대한 박 부회장의 공로를 인정해 10%의 주식 우선매수청구권까지 부여했으며 내년 3월까지 근무하게 되면 약 1000억원에 달하는 스톡옵션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이처럼 채권단은 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박 부회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줬지만 돌아온 것은 채권단의 우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발적인 '사퇴선언'이었다.
박 부회장은 6일 기자간담회에서 "스톡옵션도 포기할 계획"이라며 "채권단이 그동안 많이 도움을 줘서 회사가 전환점의 기회를 만들었는데 시간을 끌며 결정을 미루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박 부회장의 돌연 사퇴 소식은 채권단에게 충격 그 이상이었다. 사전에 연락받지 못한데다 순식간에 채권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워크아웃 졸업을 앞둔 견실한 기업의 앞길을 막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채권단 한 관계자는 "워크아웃 졸업을 위해 박 부회장과 임직원들이 고생한 것은 알고 있다"며 "그러나 사퇴라는 박 부회장의 폭탄선언과 채권단과의 갈등설로 인해 팬택을 살리기 위한 은행권의 노력은 잊혀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지난 17분기 연속으로 흑자를 기록했다는 팬택이 벌어들인 돈은 6166억원으로는 워크아웃 결정 당시 팬택이 진 빚의 절반도 갚지 못한다. 게다가 워크아웃 이후 팬택에 지원된 자금 중에는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국책은행의 자금도 포함돼 있다. 결국 팬택의 회생을 위해 국민의 소중한 세금까지 쓰인 셈이다.
사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박 부회장은 "그동안 휴일 없이 일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많이 피로하고, 체력적으로 감당이 불가능한 상태"라며 자신이 팬택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토로했지만 그것이 채권단이나 투자자들의 책임은 아니다. 그것은 조단위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한 책임은 박 부회장과 팬택 경영진의 몫이다.
◇ 박 부회장 승리?…채권단의 반격 가능성도
채권단이 워크아웃 졸업을 결정하면서 박 부회장의 사퇴 번복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8일 채권단에 따르면 팬택의 일부 채권 금융사가 팬택의 워크아웃 졸업을 위한 은행공동대출(신디케이트론) 참여 조건으로 박 부회장의 경영 복귀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팬택=박병엽'이라는 등식이 각인된 상황에서 박 부회장의 부재는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업계 역시 박 부회장의 복귀에 무게를 실고 있다. 박 부회장이 복귀해야 워크아웃 졸업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박 부회장의 사퇴는 팬택의 앞길을 가로막는 결정이 된다. 조기 복귀를 거부할 명분이 없어진 셈이다.
팬택 관계자 역시 "채권 회수와 신디케이트론 제공시 담보 제공 등을 요구한 금융기관들과 조율이 안돼 워크아웃 졸업 논란이 있었다"며 "채권단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박 부회장의 사퇴 선언이 원천무효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워크아웃 졸업이 이미 확정된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조건 조율이다. 일각에서는 박 부회장이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당장 사퇴를 번복하지 않겠지만 오는 31일 퇴임할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채권단도 이번 퇴임 사태를 마냥 좌시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채권단은 최근 박 부회장이 갖고 있는 우선매수청구권에 대해 재검토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구(舊)사주가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경우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채권단은 박 부회장에게 이를 제공했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문제 소지가 있는지 여부를 가려낼 계획이다.
만약 채권단이 박 부회장의 우선매수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박 부회장이 팬택을 되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박 부회장은 사퇴라는 카드를 들고 채권단을 상대로 사실상 승리를 거뒀다"며 "그러나 우선매수청구권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질 수 있어 박 부회장 역시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