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환자 위한 공간은 없다"
환자 치유 공간에서 수익 창출 무대로…부대시설 늘려 잇속 챙기기
"병원은 환자, 보호자를 위한 공간이 너무 없다. 그들을 위한 휴게공간이 필요하다는 요구에는 병원 내 단 한 뼘의 공간도 없다고 하면서 임대수익을 챙기는 부대사업을 위해서는 자투리 공간도 내주고 있다."
2009년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이 서울대병원 내 아뜨리움 공간을 어린이 병원을 찾는 환자, 보호자들의 휴식·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것을 요구하며 내건 성명서의 요지다.
그러나 서울대병원은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의 휴게공간을 임대료 수익을 얻기 위해 CJ프레시웨이와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노동조합의 항의에도 병원은 경비와 직원을 동원해 업체 설명회 장소의 철문까지 봉쇄하며 입찰심사를 강행했다.
병원들이 기존 환자 휴게실이나 직원들의 휴식 공간을 부대사업의 영역으로 재편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 압축본이다.
비단 서울대병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수익창출의 통로를 넓힌다는 명분으로 병원이 진료를 위한 공간에서 각종 투기 자본이 들어온 건강 테마 멀티플렉스로 재편되고 있다.
이런 흐림에 보건복지부가 불을 지폈다. 수익사업의 범위를 대폭 확대한 것이다.
의료기관의 부대사업범위는 의료인 교육과 산후조리, 장례식장, 구내식당·매점, 이·미용업, 의료기기 판매 등 8개 분야로 제한돼 왔다.
그러나 복지부는 의료법 개정을 통해 내년부터 의료기관 임대, 숙박업(호텔), 여행업, 외국인환자유치업, 온천·목욕장업, 체육시설 등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시도지사 공고였던 숙박업과 서점은 시행규칙 직접 허용으로 절차를 간소화한다.
영리병원 논쟁이 불거진 2000년대 초부터 우려한 국내 의료기관의 상업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2007년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의사는 동료 의사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당장 병원은 지하에 온천장이나 목욕탕, 숙박시설을 만들어 여관업을 하려 할 것"이라며 "관광지역의 경우엔 일부 공간만 진료를 담당하고 대부분의 시설공간은 온천, 마사지, 피부 미용, 숙박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무늬만 병원'이 등장할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의료법이 개정되면 이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병원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부르는 게 값인 뷰티 분야와 각종 부대사업에 뛰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변혜진 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국장은 "병원 공간은 적정진료를 위한 공간에서 이윤을 최대화하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익사업은 다 하라는 얘기다. 의사는 자회사가 벌이는 사업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이 된 것이다"고 개탄했다.
이어 "부대사업의 확대로 환자와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든 돈을 내야 하는 구조가 됐다"며 "정부는 국민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대형병원이 줄기차게 요구한 부대사업 확대에 복지부가 백기를 들었다"고 비판했다.
시민사회의 반대 목소리는 의료 정보가 소비자인 국민이 아닌 공급자에게 집중돼 있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있다. 독점적 성격이 강해 가격 결정을 시장에 맡겨 두었을 때, 수요와 공급에 의한 합리적 시장 가격을 형성하기는커녕 병원의 담합이나 과잉진료 등으로 의료비 지출을 늘린다고 지적이다.
병원이 자회사가 하는 의료기기·MRI·CT의 임대업 수익을 내기 위해 검사를 더 많이 하거나 효능이 좋다며 고가의 건강식품과 약품을 권해도 국민은 부적절한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는 따로 청구되지 않는 환자복과 이불 등 침구류에 사용료가 붙고 세탁비와 소독비를 포함해 하루 몇 만원씩 가격을 매길 수 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세세한 영역까지 찾다보면 상처에 붙이는 밴드에도 하나하나 값이 추가될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장점으로 병원 내 부대시설의 임대료가 높은 점도 시중가격을 올릴 수 있는 부분이다.
변혜진 국장은 "통상 5년이라는 긴 계약기간 동안 안정적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점과, 건강을 지키는 곳인 병원에 입주를 한다는 점에서 위생과 안전의 이미지를 부가로 얻을 수 있다는 점 등으로 병원 내 부대시설의 임대료가 높다"고 분석했다.
현정희 서울대병원분회장은 "병원 공간은 환자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부대사업은 환자와 보호자의 진료와 관련된 최소한의 시설이 대부분이어야 한다"면서 "이미 많은 병원이 돈벌이를 위해 과도하게 부대사업을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가격이 비싸거나 질이 떨어져도 밖으로 나가기 불편한 환자와 보호자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용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들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며 "투자활성대책으로 부대사업이 대폭 확대되고 자회사 설립으로 영리를 추구할 수 있어 병원의 권력 오남용은 심화될 것이다"고 걱정했다.
이 같은 병원 내 쇼핑 공간의 재현은 병원의 내실보다 외형만 불리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지적도 있다.
변혜린 국장은 "부대사업의 확대는 치료 공간 중심이어야 할 병원 공간을 상품소비의 공간으로 변화시켰고, 이러한 변화는 병원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평가 기준도 함께 변화시켰다"며 "치료의 상징보다는 세련되고 다양한 부대시설이 존재하는 자본의 규모가 큰 대형병원 쏠림현상이 가중됐고, 수도권 집중의 의료불균형은 점차 더 심화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병원의 대형 쇼핑몰화로 주변 골목상권과 영세상인의 피해도 충분히 예상된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부대사업이 확대되면 지하철역에서 병원까지 가는 통로에 지하 3층 규모의 아케이드 형태, 의료 관련 종합 백화점을 만들 것"이라며 "주변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동선을 짜고 공간 배치도 그렇게 할 것이다. 주변 중소상인의 피해는 불보듯 뻔한 일"이라고 전망했다.
경실련 남은경 사회정책팀장도 "부대사업이 확대되면 연관산업들이 병원으로 다 예속되는 것"이라며 "자회사에서 제조도 하고 유통도하고 판매도하면 중간 유통 상인들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병원의 파이만 커진다"고 비판했다.
최주리 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병원이 자회사를 통해 각종 부대사업을 벌인다면 대기업이 볼펜 하나까지도 자회사를 통해서 납품 받는 구조처럼 될 것"이라며 "병원 주변에는 의료기기 등을 파는 소상공인들이 많은데 그들이 받는 타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전체 생태계로 봤을 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소상공인창립위 등 관련단체는 병원의 세력 확장으로 영세 상인들이 입을 피해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도 아직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