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리메이크, 바로 이런 것…연극 '단테의 신곡'

2013-11-06     김지원 기자

고전을 재해석하는 것, 특히 시의 언어를 무대로 옮기는 일은 특별한 목적성이 없다면 하릴 없는 추상 작업에 불과하다. 원작이 모호함과 혼돈으로 가득한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이라면 더욱 그렇다.

'신곡' 국내 첫 공연으로 주목 받는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의 연극 '단테의 신곡'은 고전과 우리시대가 만나는 접접을 포착하면서 원작의 특색도 살려내는 묘를 발휘한 수작이다.

연출가 한태숙(63)씨와 작가 고연옥(42)씨가 공동 작업했다. 100편의 시 중 동시대적인 에피소드를 택해 총 150분(인터미션 20분 포함)의 러닝타임으로 극을 압축했다. 누구나 알지만,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없는 방대하고 어려운 원작의 진액을 뽑아내고자 했다.

서사시 '신곡'에는 단테가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삶의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단테'가 어두운 숲속에서 마주친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사악한 인생을 징벌하는 '지옥'과 죄인들에게 다시 한번 속죄의 기회를 주는 '연옥', 선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천국' 3편으로 나뉘었다.

원작에서는 지옥과 연옥, 천국의 분량이 같다. 지옥과 연옥, 천국을 차례대로 1주 간 순례하면서 보고 들은 광경과 사연을 1만4233행에 걸쳐 풀어놓았다.

이번 '단테의 신곡'은 지옥 부분을 1막에 배치하고 게다가 80분을 할애한다. 지옥은 세상의 모순과 왜곡이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곳이다. 단테가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하면서 신에게 반항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드라마틱한 부분이 많은 만큼 집중할 여지가 많았다.

무대에 꽉 차게 들어서는 45도의 거대한 경사의 언덕에서 진행되는 2막의 연옥은 고 작가가 해석한 작품의 주제 의식을 한껏 담아낸다. 단테는 연옥을 오르면서 여러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공감하며, 이들을 위해 기도까지 하기에 이른다. 자신은 죄가 없고 깨끗하다며 제 잘난 맛에 살아온 단테에게는 크나큰 변화다. 단순히 죄와 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그렇게 드러난다.

극의 마지막에 마침내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천국에서 두 사람이 기울어진 무대에서 몸을 다양한 각도로 비트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연상시키는 두 사람의 몸짓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 겪은 고통을 끝내는 환희다. 지옥을 견디는 자, 단테는 아득하게 원했으나 구하지 않았던 사랑을 마침내 얻게 된다.

'단테의 신곡'은 단순한 연극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다층적이다. 창극 '장화홍련'과 연극 '안티고네'에서 한 연출과 함께 한 작곡가 홍정의(31)씨가 음악을 맡고 15인 오케스트라까지 꾸렸다. 바이올린과 첼로는 물론 피리, 가야금 등 국악기가 주축이다.

배우들 중에서는 단테의 뮤즈 '베아트리체'를 맡은 소리꾼 정은혜(29)를 비롯해 국립창극단 단원들도 대거 포함됐다. 여기에 영상까지 결합하고, 오브제 아티스트들도 힘을 보탰다. 이를테면 총체극이다.

지옥문을 지나 영원한 형벌 속에 고통받는 죄인들을 만나며 두려움과 공포, 연민에 휩싸이던 단테가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의 출구를 열고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과정을 장르 하나 만으로 포섭하기에는 숨이 가쁘다. 총체극이라는 장르는 그로테스크한 특성을 살리면서 작품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다.

특히 1막은 창, 2막은 주로 성악 발성이 사용되는데 창은 지옥의 절절함, 성악은 연옥과 천국으로 이어지는 신비스러움을 북돋는데 한몫한다.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인다. 극중 단테가 여행을 떠날 때 나이와 같은 단테 역의 연극배우 겸 뮤지컬배우 지현준(35)은 분노와 연민, 애틋함을 오가는 다양한 감정 연기를 무리 없이 소화한다.

단테의 길잡이 베르길리우스를 연기하는 탤런트 겸 연극배우 정동환(64)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선사하며 남편의 동생과 애욕에 휩싸이는, 지옥에서 등장하는 '프란체스카' 역을 맡은 연극배우 박정자(71)는 존재감 만으로 빛을 발한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지옥의 판관 '미노스'역의 국립창극단 주역 김금미(48)는 커튼콜에서 가장 박수를 많이 받는 이 중 한명이다.

지난해 1월 제작에 돌입한 '단테의 신곡'은 국립극장의 2013~2014 레퍼토리 시즌작 가운데 하나이자 '국가브랜드 공연' 프로젝트 3기 작품이다.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국가브랜드라는 명칭이 관람 뒤에는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관객들의 반응 역시 폭발적이다. 지난 2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린 이 작품은 9일까지 총 7회 공연하는데 회당 1149석 총 8043석이 매진됐다. 개막 당일 시야장애석인 1층 객석 양사이드 2줄과 3층 첫째줄까지 판매, 객석점유율 105%를 찍으며 전석 판매를 예고했다.

국내 창작 초연 작품이 1000석이 넘는 규모의 극장에서 매진된 것은 이례적이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공연만 살펴보면, 2001년 국립극단이 탤런트 김석훈(41)을 캐스팅한 연극 '햄릿' 이후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