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오는데 자녀 등록금-결혼시키다보니…' 은퇴준비 낙제점
#올해 초 대기업에서 정년퇴직한 박모(58)씨는 먼 훗날의 일만 같던 은퇴가 갑작스레 다가와 당황스럽다. 은퇴한지 8개월이 넘었지만 60대를 어떻게 보낼지 구체적인 구상을 해 본 적이 없다. 직장과 가족 등 현실에만 매달린 탓에 노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자녀를 둔 그는 보통의 부모가 그렇듯 자녀들의 생활비와 학비, 결혼자금 등을 보태며 부양을 책임졌다. 그러다 문득 "가정을 위해 30년 넘게 일했는데 나한테 남은 것이 이것 밖에 없나" 회의감이 몰려왔다.
#나름 잘나가던 전자부품 중견기업에서 영업관리 파트 부장이었던 김모(57)씨도 여생이 녹록치 않다. 5000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은 그는 부장급의 만기연령인 55세에 도달해 회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이후 재취업의 기회를 찾아봤으나 60대를 앞두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파트 경비원 외에는 거의 없었다. 여기에 김씨는 출가하지 못한 딸 2명의 부양책임까지 떠안고 있어 등허리가 휠 지경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첫째 딸은 아직 결혼을 못해 혼사 자금이 부담되고 대학생인 둘째딸은 떨어질 줄 모르는 대학 등록금에 한숨만 나온다.
이들처럼 한국의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를 포함해 50~60대 장년층은 부모와 자식의 부양을 동시에 책임지는 탓에 빈곤한 노후에 직면하고 있다.
가정과 자녀를 위해 전력투구하며 살다 보니 자기계발은 뒷전이었고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해 자신의 노후 생계는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박씨는 "애 셋 다 대학 보내고 결혼까지 모두 내가 번 돈으로 해결했는데 은퇴 준비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냐"며 "그냥 평범하게 살았는데 자연스럽게 난 점점 가난해졌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는데 미래가 막막하니 억울하게도 느껴졌다"고 토로했다.
서울대 한경혜 교수팀 등이 베이비부머들의 은퇴준비 상황을 점검한 결과 준비가 부족한 사례가 절반을 넘었다. 개인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저축이나 투자가 상당히 미흡하거나(30.3%), 아직 시작조차 못하거나(15.8%), 계획이 없다고(10.6%) 응답했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지난 5월말 발표한 연구 자료를 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은퇴준비 상황이 낙제점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소가 은퇴 후의 삶을 구성하는 생활영역으로 여가, 일, 가족과 친구, 주거, 마음의 안정, 재무, 건강 등 7가지 요소를 상정해 25~65세의 비은퇴자 1800명과 55~75세 은퇴자 200명을 일대일 면접방식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은퇴준비 점수가 58.3점에 불과했다. 은퇴준비를 잘 한 상위 10%는 77.1점을 받았으나 은퇴가 임박한 60대 이상 세대는 56.0점, 1954~57년생인 전쟁직후 세대는 56.7점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된 이때 노인복지 예산 확대와 일자리 확보 등으로 이들을 뒷받침하지 못할 경우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교수는 "연금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점점 많아지고,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연금액을 늘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결국엔 세금을 노동시장에 쓰는 것이 가장 맞지 않나 생각한다. 노동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은퇴자들이 다시 일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세금을 내게 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인 선순환 구조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정정도의 증세가 필요한데 증세에 대한 반발이 심하다. 가령 근로소득자의 월급만 증세의 표적이 된다는 측면인데 형평성과 투명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꾸준하게 신뢰를 쌓아가면서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증세를 해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