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 경주·부여 여행 다녀오자…한국사 공부는 덤
추석 연휴는 토·일요일인 21일과 22일을 포함해 18일부터 닷새나 될 정도로 길다. 쉴 수 있는 날이 많은만큼 모처럼 모인 가족과 함께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명절 추석에 3대가 다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역사 속으로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백제의 고도 부여와 신라의 고도 경주다. 정부가 한국사를 2017년부터 대입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려고 하니 더욱 의미있는 여행일 것이다. 한국관광공사의 추천을 받아 부여와 경주의 특별한 여정을 찾아봤다. 고구려의 평양과 고려의 개성이 북녘에 있어 이번 추석에도 가볼 수 없는 것이 또 한 번 아쉬워진다.
◇낙화암 언덕에서 사비수를 굽어보다(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무너져 내린 비극적 종말을 알기 때문인지 백제를 떠올리면 화려한 영광보다 의자왕, 낙화암, 삼천궁녀, 계백장군, 황산벌, 오천결사대 등 비장함과 애잔함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700년 역사를 돌아보면 힘없고 나약한 나라 만은 아니었다. 풍요롭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이룩한 국가다. 하다못해 사치와 향락으로 나라를 신라에 헌납한 마지막 의자왕의 치세가 한때 ‘해동성국’이라 불렸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말이 더욱 실감나게 받아들여진다.
백제가 마지막 123년을 보낸 곳이 사비, 곧 지금의 부여다. 성왕 때인 서기 538년 웅진에서 이곳으로 천도해 터를 잡았다. 이후 백제는 중흥했으며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빼어나고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의 거센 물살 속으로 초개처럼 몸을 던졌듯 백제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백제의 흥망사를 한 눈에 살피고 싶다면 백제 시대 유물 1만5000여점을 소장한 국립부여박물관에 가보자. 공개된 1200여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대표적 유물이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다. 백제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을 미뤄 짐작하게 해주는 귀중한 것이다.
박물관에서 길 하나 건너면 정림사지다. 이 절터에 백제 시절의 모습 그대로 1400년 동안이나 제자리를 지켜온 석탑이 있다. 국사책에도 나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이 탑은 백제탑의 완성이면서 후대 여러 탑들의 모범이자 교본이 됐다. 그러나 이 탑을 꼭 찾아봐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새겼다는 ‘大唐平濟國碑銘’(대당평제국비국; 위대한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고 기념으로 탑에 새긴 글)이라는 글씨 때문이다. 망국의 한을 느끼는 사이 나도 모르게 애국자가 된다.
부여 여행은 부소산에서 절정에 이른다. 높이가 106m 정도되는 낮은 산이지만 산에 스며든 역사의 무게는 묵직하다. 백제 말 삼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삼충사를 거치고 영일루, 군창터, 반월루, 궁녀사, 사자루, 백화정을 차례로 지나면 낙화암에 이른다. 아래 흐르는 강이 금강, 그러나 부여에서는 백마강이요, 1300여 년 전 그날에는 사비수였다. 역사는 역시 아무 말하지 않는다. 후대가 느낄 뿐이다.
백제 시절에는 도성인 사비성의 관문이자 큰 항구였던 구드래 나루, ‘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이 팠다는 현존 최고의 인공 연못 궁남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그려진 능산리 고분을 비롯해 백제 시절의 능 일곱 기가 모인 백제왕릉원에도 가보자.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041-830-2010
◇낭산이 품어 안은 왕릉을 따라 걷다(경북 경주시 배반동·보문동)
신라의 도읍으로 1000년을 지내고 신라가 고려에 나라를 내준 뒤 다시 1000년을 지냈다. 도합 2000년이다. 강산이 200번 넘게 바뀌는 동안에도 신라의 고도 경주는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수학여행으로 누구나 한 번쯤 찾아봤을 곳이 경주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불국사, 석굴암을 벗어나 선덕여왕 등 옛 신라 왕들이 잠들어있는 낭산(狼山)은 어떨까. 낭산은 남산·토함산 등 경주의 이름난 산들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높이 108m의 나지막한 산이다.
실성왕 때인 서기 413년 산 위로 누각처럼 생긴 구름이 뜨고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났다. 그러면서 이 산은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면서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는 신들의 공간으로 보호돼 왔다. 이 산자락을 선덕여왕, 진평왕, 신문왕, 효공왕, 신무왕 등 유난히 많은 왕들이 유택으로 삼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가장 먼저 들를 곳은 신라 제52대 효공왕릉이다. 능을 둘러싼 민가들 사이로 들어가면 울창한 솔숲 아래 왕릉이 보인다. 따로 담장도, 문도 없다. 그저 작은 입석 2개가 드나드는 문임을 표시할 뿐이다. 철길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10여분을 가면 신문왕릉에 닿는다. 낭산 자락의 왕릉 중 유일하게 담장을 두르고 섰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돌을 쌓아 올린 뒤 봉분을 돋운 왕릉을 볼 수 있다. 거북의 발처럼 석축을 받치고 선 호석이 있는 것도 독특하다.
신문왕릉에서 도로를 따라 900여m만 내려가면 사천왕사지 입구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선덕여왕릉으로 오르는 길이 시작된다. 비로소 낭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도 베어내지 말라”는 그 옛날 왕의 명령 때문인지 낭산은 빼곡하게 자란 나무로 가득하다.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하늘이 밝아지는 곳에 여왕의 안식처가 있다. 왕릉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경계를 만들어둬 나무가 그 안쪽으로는 자라지 않은 덕이다. 그래서 낭산을 올라 유일하게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평지에 자리한 대부분의 왕릉과 달리 선덕여왕릉이 산 위에 있게 된 것은 죽은 뒤 낭산 남쪽인 도리천에 묻어달라 한 왕의 유언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문무왕 때인 서기 679년에 낭산 아래에 호국불교의 총람인 사천왕사가 지어졌다. 여왕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뜻에서다.
선덕여왕릉 뒤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능지탑과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다.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은 무너져 흩어진 돌을 모아 다시 쌓은 것으로 그 원형을 알 수 없어 2단만 쌓고 나머지 돌들은 옆에 모아뒀다고 한다. 탑신 아래 정교하게 새겨진 십이지신상이 있으니 관심을 가져 보자.
능지탑 옆에 터를 잡은 중생사 안쪽에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다.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새겨진 보기 드문 삼존불이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모습이 고려시대 지장보살의 모습과 비슷해서인지 사찰에서는 보호각을 씌우고 지장전이라는 현판을 붙여놓았다.
진평왕릉, 보문리사지, 황복사지는 보문들판 한가운데 있다. 제일 먼저 찾아갈 곳은 진평왕릉이다. 능을 에워싼 활엽수들과 작은 수로가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 낸다. 보문리사지는 진평왕릉에서 논 사이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되고, 왕실의 복을 기원하던 황복사지도 지척이다.
경주에서 꼭 찾을 곳은 신라문화의 절정들이 담긴 국립경주박물관이다. 이곳에서 금관, 토우달린 목항아리, 말탄 무사모양 토기 등의 국보와 경주 영묘사터에서 발굴돼 신라인의 대표얼굴이 된 얼굴무늬수막새를 만날 수 있다. 종일 걸으며 만났던 왕들의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유물들도 찾아 복습해 보는 것도 좋겠다.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054-779-6395